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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한사발
숭늉한사발23.03.29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갈등은 어디서부터 시작됐나요?

고종의 비를 들일 때 흥선대원군이 실질적으로 선택했었고, 서로 사이도 나쁘지 않았던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상가 틀어진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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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9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3.29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맨처음 흥선대원군은 며느리를 뽑을때 세력이 없는 가문의 딸을 며느리로 맞아들였습니다.

    그 이유가 나중에 자신의 아들이 임금이되면 왕비가 세력이 강해질까봐였지요.

    명성황후는 처음에는 흥선대원군의 말에 고분고분 했습니다. 그러나 차츰 서양문물에 대해 관심을 보이면서 대원군과 마찰을 빚었습니다.그 당시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펼치고있는데 명성황후는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려하면서 외국세력에 대해 호의적이었습니다. 결국 서로를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명성황후는

    정치적인 수완이 좋아서 최근에 정치적으로 소외된 안동김씨 세력을 포섭하고, 각종 주요 대신들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어 갑니다. 이때 쯤 서원정리나 양반에 대한 납세로 불만이 많아진 사대부들 중에서 한명인 최익현을 앞세워 대원군의 정치적 퇴각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게 됩니다.

    이로 인하여 이하응은 왕실 세력에서 물러나고 사가에서 지내개 되지만 이후에도 왕과 중전에 대한 도전은 계속되었고, 여러번을 실패를 통하여 결국 사가에 갖히게 되는 수모를 당하게 됩니다.


  • 흥선 대원군은 외척 세력에 의한 세도 정치를 일소하고자 고종의 비를 들일 때

    고의로 쇠락한 집안의 민씨를 선택했습니다. 그가 바로 명성황후입니다.

    처음에는 두 사람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지만

    이들의 사이가 멀어지게 된 결정적 계기는 고종의 서장자인 완화군 문제 때문입니다.

    완화군은 고종이 궁궐에 들어와 사랑에 빠진 궁녀 영빈 이씨의 아들이지만,

    서자입니다.

    명성황후 입궐 후 영빈 이씨와 명성황후는 경쟁 관계가 됩니다.

    완화군은 서자이지만 큰 아들이었기에 흥선 대원군이 총애하면서

    세자로 삼으려는 마음을 드러냈기 때문에 그때부터 명성황후와 사이가 틀어집니다.

    안녕하세요. 이병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흥선대원군은 을미사변과 관련하여

    해명보다는 침묵을 선택했다.

    그 침묵은 오랫동안 그 시기를 흥선대원군(1820~1899)과 명성황후(1851~1895)의 대립구도로 만드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미양요가 끝난 뒤 흥선대원군은 서울의 종로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우고 조선은 철저하게 외국과의 교류를 끊고 통상수교거부 정책을 펼칩니다.

    궁에 들어온 명성황후는 남편인 고종과 손잡고 흥선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에 반대하며 개화정책을 추진했고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는 등 활발한 외교정책을 통해 조선을 강하게 만들고자 합니다. 그러나 준비 없이 무작정 문을 연 개화정책은 여러 문제를 가지고 오고 이 와중 흥선대원군은 권력의 핵심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김보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갈등은 치열한 권력 타툼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에 권력을 배제 하기를 원했고

    명성황후는 권력을 잡으려 했었기 때문에 사이가 안좋았습니다.


  •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처음에는 관계가 나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외척의 세도가 없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던 흥선대원군의 생각은 잘 못 된 것이었습니다.

    명성황후는 권력에 대한 야망이 있는 왕비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이 간택했지만 사람을 잘 못 본 것이었지요.

    1874년 11월, 명성황후의 오빠 민승호의 집에서 폭탄이 터지며 민승호가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명성황후는 이 사건을 흥선대원군이 테러를 지시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되면서 사이가 벌어지게 됩니다.

    이에따라 충정공 민영환의 아버지 민겸호가 집안을 계승하게 됩니다.

    마침내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가 크게 대립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 사건이 1882년에 일어난 '임오군란'이었습니다.

    임오군란의 배후에 대원군이 있다고 명성황후는 생각하였고 자신을 죽이려 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명성황후는 이에 고종을 설득해

    청나라 세력을 조선에 끌어 들이게 되는데 이는 청군의 손으로 자신의 백성을 죽이는 일이 됩니다. 이일을 계기로 조선은 청나라에게

    많은 이권을 넘겨주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박정욱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고종의 비를 들일 때 흥선대원군과 대원군은 모두 비를 들일 수 있는 자격이 있었지만, 흥선대원군이 최종적으로 선택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흥선대원군이 민중의 지지를 많이 받았고, 또한 그의 부친인 이하응이 개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 등이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원군과 명성황후 사이가 틀어진 계기는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1895년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한 고종은 대원군에게 제국의 유수한 군대를 인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에 반발한 대원군은 반란을 일으켜 군대를 빼앗으려 했고, 이에 대한 진압 작전이 일어났습니다.

    이후 대원군은 체포되고 흥선대원군은 피살되었으며, 명성황후는 이 사건과 관련하여 강경파로 비판받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대원군과 명성황후 사이의 갈등은 깊어지게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종의 비를 들일 때 흥선대원군이 실질적으로 선택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닙니다. 이는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한 독립협회 출신자들이 만든 거짓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흥선대원군은 이 시기에 이미 사망하였습니다.

    대원군과 명성황후는 처음에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대원군이 1866년 갑신정변을 일으키면서 상관관계가 나빠졌습니다. 이후 대원군은 명성황후와 대립하며, 1873년 대원군은 명성황후를 비롯한 청년 5명을 죽이는 계엄사태를 일으켰습니다. 이로인해 대원군은 청나라와의 전쟁을 일으키고, 결국 청나라에 패배하게 됩니다.

    이후 대원군은 국왕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궁중에서 격리 생활을 하게 됩니다.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관계가 틀어지게 된 계기는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