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미나미 총독이 그를 찾아와 경기도 경성부 서사헌정 박문사에서 위령제가 열리는데 그 자리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차남 이토 분키치에게 사과하면 삶과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제의했고
결국 1939년 10월 16일 박문사에서 사죄와 함께 일제에 충성을 바치겠다고 한 후 제 부친께서 어리석은 생각으로 당신의 아버님을 죽게 만들었는데 이에 아들로서 아버지의 오만방자한 만행을 진심으로 사죄한다는 퍼포먼스를 했습니다.
안준생의 상황을 보면, 일제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아직 한반도에 살고 있으면 취직에 제한을 주거나 계속 감시를 했고,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있던 시절 그의 가족들을 데리고 보호했으나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의거 이후 임시정부는 일본의 수색으로 급히 상하이를 떠났고 안준생 일가는 남겨지는데 이후 일본군이 이들 가족을 찾아냈고 그의 가족들은 일본의 감시하에 살아야 했습니다.
안준생이 서른이 되어서도 일본의 탄압으로 취직을 못했고 구걸로 연명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일제가 반강제적으로 그를 회유했기 때문인데 그 이후 뚜렷하게 친일활동을 한 행적이 없어 그를 명백히 친일파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