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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빙
비비빙23.06.13

강감찬은 어떤업적을 세웠는지 궁금합니다

강감찬은 어떤업적을 세웠는지 큰전쟁을 몇번이겼다는데 역사적 배경와 강감찬이라는 인물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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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강감찬은 고려시대 전기의 위인으로, 다양한 업적으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아래에 강감찬의 주요한 업적들을 설명하겠습니다:

    1. 거란의 물리침: 강감찬은 26년 동안 고려를 괴롭혔던 거란을 물리쳤습니다. 거란은 고려의 북쪽 지역에서 침입하여 정복하려는 시도를 여러 차례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강감찬은 거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전투에 나서고, 강력한 군사력과 전략을 통해 거란을 격파했습니다. 이는 고려에게 큰 승리로 이어지며, 강감찬은 고려의 영웅으로 간주되었습니다.

    2. 나성과 천리장성의 축조: 전쟁 이후, 강감찬은 개경에 나성을 건설하였습니다. 나성은 도성의 일종으로,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세운 벽입니다. 또한 국경 지방에는 천리장성을 축조하였습니다. 천리장성은 크고 견고한 성곽으로, 국경 지역에서의 방어를 강화하고 안정과 평화를 유지하는데 기여했습니다.

    3. 귀주대첩: 강감찬은 귀주대첩에서 거란군을 섬멸하였습니다. 귀주는 거란의 주요한 침공 지역 중 하나였는데, 강감찬은 거란군의 공격을 막기 위해 귀주에서 전투를 벌였습니다. 그 결과, 강감찬은 거란군에게 큰 승리를 거두었으며, 거란의 공격을 일시적으로 막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러한 업적들로 인해 강감찬은 고려시대에서 가장 저명한 장군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으며, 그의 업적은 고려의 안정과 국가의 번영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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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14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강감찬하면 가장 큰 업적은 귀주대첩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강감찬 장군이 막아낸 의적은 거란입니다. 현종이 즉위하자 거란의 성종은 목종을 끌어내린 강조의 정변을 구실 삼아 여러 차례 고려를 침공하였고, 1018년의 세 번째 거란의 침략을 물리친 인물이 강감찬 장군입니다. 이후 현종의 친조를 들어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며, 재차 침입한 거란의 소배압을 귀주에서 뛰어난 계략으로 물리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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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감찬

    거란이 10만 대군을 끌고 우리나라를 침략할 때 적을 무찌르고 달아나는 적을 귀주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대표적인 업적이 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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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강감찬은 신라와 백제, 가야 등을 포함한 다수의 지배층을 동시에 물리치고 당나라와의 치열한 전쟁에서 11번의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안동성 전투, 고구려 요해, 숙성성 전투 등을 통해 선조들의 사상을 이어받아 태극기를 들고 이씨조상의 대표로 우리 민족의 단합을 위해 싸웠으며 백제와 신라를 정벌하면서 강남지역을 점령, 국내 군사력을 강화했습니다.

    고려초기 따르던 관례제를 폐지하고 평등한 관료제 구축, 지방관리제도의 주요 변화인 재상제도를 도입, 지방 관리자를 평민 중 선발, 비리 행위를 검사하던 백원사와 향리 신설로 지방 행정을 투명화했습니다.

    역사서나 녹음 등의 역사 기록을 세우고 제사 제도를 개선해 외교관이 와도 짐작할 수있는 의중부와 관리부에서 무당, 무녀 등을 선발하여 행사를 향상시켰으며 한글 교육, 문화, 정치 활동의 영역을 활용해 나라를 효율적으로 운영토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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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강감찬 장군은 고려시대 전기의 인물로 귀주대첩으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다음의 내용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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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983년(성종 3) 과거 갑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예부시랑(禮部侍郞)이 되었다. 1010년(현종 1) 거란의 성종(聖宗)이 강조(康兆)의 정변을 표면상의 구실로 내세워 서경(西京)을 침공하자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현종(顯宗)을 나주(羅州)로 피난시켜 사직을 보호케 하였다. 이듬해 국자좨주(國子祭酒)가 되고, 한림학사(翰林學士) · 승지(承旨) ·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 중추원사(中樞院使) · 이부상서(吏部尙書) 등을 지냈다.


    1018년(현종 9) 경관직(京官職)인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內史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와 외관직(外官職)인 서경유수(西京留守)를 겸하였다. 서경유수는 단순한 지방의 행정관직이 아니고 군사지휘권도 행사하는 요직으로서 거란의 재침에 대비하기 위한 조처였다. 그 해에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주1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였다. 강감찬은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총사령관격인 상원수대장군(上元帥大將軍)이 되어 부원수 강민첨(姜民瞻) 등과 함께 거란군을 격파하였다. 이때의 구주대첩(龜州大捷)은 대외항전사상 중요한 전투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거란의 침입에 대비해 고려의 20만 대군은 안주(安州)에서 대기하다가 적의 접근을 기다려 흥화진(興化鎭: 현재 평안북도 의주군 위원면)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정예기병 1만 2000명을 산기슭에 잠복 · 배치한 뒤 큰 새끼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아두었다가 때를 맞추어 물을 일시에 내려 보내 큰 전과를 거두었다. 전투에서 패전한 거란군은 곧바로 개경(開京)을 침공하려 했으나, 자주(慈州: 현재 평안남도 자산)와 신은현(新恩縣: 현재 황해도 신계)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패퇴하였다. 특히 구주(龜州)에서 전멸에 가까운 손실을 입은 거란군은 애초 10만의 병력 가운데 고작 수천에 불과한 인원들만 살아 돌아갔다고 한다.


    이때의 전공으로 현종은 친히 영파역(迎波驛)까지 마중을 나와 강감찬을 극진히 환영하였다. 강감찬으로 인해 거란은 침략야욕을 버리게 되었고 고려와는 평화적 국교가 성립되었다. 또한 강감찬는 개경에 나성(羅城)을 쌓을 것을 주장해 국방을 더욱 튼튼히 하는 데에도 큰 공을 세웠다. 전란이 수습된 뒤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 식읍삼백호(檢校太尉門下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天水縣開國男食邑三百戶)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1020년에는 특진검교태부 천수현개국자 식읍오백호(特進檢校太傅天水縣開國子食邑五百戶)에 봉해진 뒤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1030년(현종 21)에 다시 관직에 나아가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고, 이듬해 덕종(德宗)이 즉위하자 개부의동삼사 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 특진 검교태사 시중 천수현개국후 식읍일천호(開府儀同三司推忠協謀安國奉上功臣特進檢校太師侍中天水縣開國侯食邑一千戶)에 봉해졌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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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3대 대첩(大捷)'을 꼽는다면, 두말 할 것도 없이 을지문덕의 살수대첩과 이순신의 한산대첩(閑山大捷), 그리고 강감찬(姜邯贊)의 귀주대첩(龜州大捷)을 든다. 그중 고려 시대 거란의 수십만 대군을 맞아 귀주에서 섬멸한 귀주대첩을 이끈 장군이 바로 강감찬이다.


    강감찬은 948년(정종 3)에 태어났다. 그의 탄생과 관련해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한 사신(使臣)이 밤중에 시흥군으로 들어오는데 큰 별이 어떤 집으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가 사람을 보내 찾아보니 마침 그집 부인이 사내를 낳았다. 그가 바로 강감찬이었다고 한다. 강감찬의 어릴 때 이름은 은천(殷川)이다. 강감찬의 아버지는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할 때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 된 강궁진(姜弓珍)이다. 《고려사》에는 강감찬이 어려서부터 공부하기를 좋아하고 신통한 지략이 많았다고 전한다.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사실 때문에 강감찬을 무인으로 알기 쉽지만, 사실 강감찬은 문관이었다. 983년(성종 2) 진사시에 합격하고, 복시(覆試)에서 갑과에 장원한 뒤 관직에 오른 후 예부시랑·국자제주(國子祭酒)·한림학사·승지·중추원사·이부상서를 역임했다.


    1010년(현종 1), 거란은 30만 대군을 이끌고 두 번째로 고려를 침략했다. 우여곡절 끝에 등극한 현종은 전쟁에 미처 대비할 틈이 없었다. 그래서 고려군은 속수무책으로 패전을 거듭했다. 이때 강감찬은 장수로 나서지는 않았으나 왕에게 끝까지 항복하지 말 것을 주장해 관철시켰다. 왕이 피신한 사이 다행히 양규(楊規)가 무공을 크게 세워 거란을 물리쳤다. 그러나 거란은 1018년(현종 9)에 또다시 고려를 침략했다. 이때 강감찬이 나섰다. 강감찬은 흥화진(興化鎭)과 귀주(龜州)에서 뛰어난 전략과 기지로 거란군을 대파하고 승리했다. 고려는 안정을 되찾아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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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천지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강감찬 장군의 업적 귀주대첩이 있습니다.

    강감찬 장군은 고려의 문신이자 장군으로 1018년 거란 장군 소배압이 쳐들어 왔을 때 크게 무찌렸습니다.

    그리고 구선집, 낙도 교거집 등을 집필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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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앞에서 언급했듯 <문곡성 강림 설화>가 있는 걸로 잘 알려져 있다. 훗날 강감찬이 재상이 되었을 때 북송의 사신이 강감찬을 보고

    "문곡성이 보이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는데 여기서 뵙습니다."

    라며 인사를 올렸다는 일화이다.[31] 또한 강감찬이 태어난 곳이 '낙성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낙성대는 고려의 수도 개경에도 있었다. 즉 개경에 있었던 강감찬의 저택을 일컬어 민간에서 '낙성대'라 불렀다고 하며, 이곳은 서울과 반대로 강감찬이 사망할 때 별이 떨어진 곳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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