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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4.18

왜 명성황후의 일대기를 미화해서 그린 예술작품이 많을까요?

실제 역사적으로 명성황후는 똑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매우 사치스럽고 백성들을 생각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왜 매체에서는 명성황후를 매우 현명하고 능력있는 여인으로 그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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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1개의 답변이 있어요!
  • 굉장한비오리121
    굉장한비오리12123.04.18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뮤지컬과 드라마 등의 영향으로 미화가 많이 된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명성황후는 그녀가 죽고 1897년 대한제국 선포 후 부여된 칭호고

    당대에는 민비 등으로 불렸는데 살아있을 때부터 평이 좋지않았습니다.

    19세기 초반부터 세도정치의 부패와 혼란으로 조선이 본격적인 쇠퇴의 길을 걷게된 후

    흥선대원군이 고종의 섭정을 맡으며 어느 정도 정리하는가 싶었습니다.

    하지만 고종의 친정 이후 민비의 일족, 흔히 민씨 척족이라 불리는 인물들이

    세도정치기와 다를바 없이 주요 관직을 민씨들로 독차지하다시피하고

    매관매직과 온갖 부정부패로 재물만 긁어모아 수많은 사람들의 비난과 지탄을 받았죠.

    당연히 그 중심에는 민비가 있었고 또 민비가 자리하고있기에 가능한 일들이었습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에는 외국군대인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자국 군인들과 백성들을 사살하게하는 등의 악업을 저질렀고

    또 이후 외세의 본격적인 간섭에 큰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한편으론 궁궐에 무당 등을 불러들여 굿을 하는 등의 헛짓으로

    국고를 거듭 탕진했습니다.

    위에도 적었지만 이미 민비와 같은 시대를 살던 조선인들 사이에서

    민비는 결코 좋은 평가를 받지못하던 왕비였고

    임오군란 등의 예를 봐도 알 수 있듯 조선백성들에게 끌려와 죽어도 이상하지않았습니다.

    그랬던 민비가 그 최후의 모습이 일본의 간악한 수법으로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단 이유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오히려 외세에 맞서 나라를 지키려 처절하게 노력한 왕비로 미화되기 시작했죠.

    실상은 본인과 일족의 권력유지와 부귀영화를 위한 노력에 불과했으나 말입니다.

    한동안은 매체의 영향으로 미화된 민비의 모습을 진실로 알고 애도하는 사람들도 많았으나

    인터넷 등의 발달로 당대의 실제 평가 등을 알게되며 그 실체를 뒤늦게 깨닫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워낙 대중매체의 영향력이 강하다보니

    여전히 미화된 이미지 그대로를 믿고있는 이들도 적지않게 남아있는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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