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군의 진격에 조선은 자체적으로 대응이 불가능했나요?
동학농민군의 봉기에 대해서 청나라에 고종이 직접 출병을 요청했다는 기록들이 삼국에 모두 존재하는데 조선의 중앙군은 이를 스스로 진압할 수 있는 여력이 부족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94년 동학 농민 혁명 당시 황토현 전투는 전라 감영군과 동학 농민군과 의 전쟁이고, 황룡촌 전투는 중앙군과 동학 농민군의 전쟁입니다. 그런데 질문에 의하면 중앙군을 언급하였기에 장성 황룡촌 전투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황룡촌 전투는 홍계훈이 이끄는 300명이 전봉준, 순화중, 김개남이 이끄는 7000여명의 농민군의 대결합니다.
일단 아무리 미개한 수준의 무장이라도 사기와 규모면에서 농민군이 월등하며, 장태 등 농민군의 전술이 뛰어났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동학 농민군의 일부가 흥선대원군과도 내통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민씨 내각의 조선 조정은 농민군을 제거할 계획으로 일본과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고종과 민씨 세력은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였고, 청이 이에 응하자 일본 역시 톈진 조약을 빌미로 군대를 동원하였다. 이처럼 외세가 개입하자 농민군과 관군은 회담을 통해 화의를 약속하고 싸움을 중단하였다.하지만 조선에 진주한 청, 일 양국군은 돌아가지 않았다. 일본은 청에게 조선의 내정 개혁을 함께 실시하자고 제의하였지만 청은 이 제의를 거절했고 그러자 일본은 불법으로 조선 궁궐 경복궁을 침범(갑오왜란) 명성황후 민씨 정권을 몰아내고 흐선대원군을 앉혀 꼭두각시 정권을 탄생시켰다고 합니다. 김홍집, 어윤중, 박영효, 서광범 등을 중심으로 한 제1차 김홍집내각, 즉 친일 내각은 일본공사 오토리의 입김 아래 일련의 개혁조치를 취했느데 이것이 조선정부와 동학농민군과 맺은 자주적인 개혁 전주화약을 간섭한 친일내각의 갑오 개혁 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동학농민의 1차봉기는 관군을 연파해 전라도를 장악해갔습니다. 황토현 전투가 대표적이었습니다. 이에 정부는 청에 군사를 요청하였으며 이에 따라 청군이 아산만에 일본군은 인천으로 들어왔습니다. 이는 갑신정변 후 청일간에 맺은 톈진조약의 결과였습니다. 일본군이 청군을 선제공격하며 청일전쟁이 터졌으며 이에 동학농민의 2차봉기가 일어났으나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실패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가렴주구에 흥분한 민중들은 동학 고부 갑주 전봉준의 기치아래 동학혁명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나 조정에서 세금을 낮춰주고 조병갑을 탄핵하겠다는 약속을 믿고 혁명군을 해산시키게 됩니다. 그러나 조정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세금 역시 달라진 것이 없자 동학혁명군은 재차 혁명을 일으키게 되면서 반봉건 반외세 투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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