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말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 일본의 목적과 그 이후 조선의 정세는 어떻게 흘러갔나요?
조선말 참으로 다양한 사건들이 펼쳐지면서 힘든시간들을 겪었는데요.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 일본의 목적과 그 이후 조선의 정세는 어떻게 흘러갔나요?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73년(고종 11) 말 고종이 친정을 단행하면서 조선 정부의 대일 방침은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고종은 대일 교섭을 담당했던 동래부사와 왜학훈도를 처벌하고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모색하였습니다. 이에 1875년 2월 조선은 일본과의 공식적인 교섭을 재개했으나, 일본 측 관리들은 서계에 황제를 지칭하는 ‘황’, ‘칙’을 사용하였습니다. 결국 조선 정부는 서계 접수를 거부하고 일본과의 교섭을 철회했습니다.
그러자 일본은 부산 앞바다에서 함대를 앞세우면서 무력시위를 전개했습니다. 그해 9월에는 운요호가 조선군의 제지를 무시하고 강화도의 초지진으로 접근을 시도하였습니다. 조선 병사들이 운요호의 접근을 제지하려고 하자, 운요호는 초지진을 향해 포격하고 영종도에 상륙해서 각종 물자를 약탈하였습니다.
1876년 초 일본 정부는 구로다 기요타카를 전권대신으로 임명하고 6척의 함대와 800명의 병사들을 편성해서 조선의 강화도로 파견하였습니다. 구로다 일행이 강화도에 도착하자 조선 정부는 판중추부사 신헌을 접견대관으로 임명했습니다. 구로다는 조선 측에 운요호 포격의 책임을 전적으로 조선에 돌리고, 이를 빌미로 근대적 조약을 강요하였습니다.
조선 정부 내에서는 조약 체결 여부를 둘러싸고 찬반양론이 일었으나, 박규수는 현실적으로 조선이 일본과 맞서 싸울만한 군사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일본 측과 교섭을 전개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습니다. 결국 1876년 조선 정부는 과거 일본과의 관계를 회복한다는 명분을 앞세우면서 일본과 강호도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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