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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도화지113
하얀도화지11323.10.17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킨 역사적 배경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조선시대 대표적인 전쟁하면 일본군이 쳐들어온 '임진왜란'이 있는데요

일본은 왜 조선을 쳐들어온건가요? 전쟁을 일으킨 역사적 배경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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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출신 성분이 천했기 때문에 권력의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고 외부에 적을 만들어 이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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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이 임진왜란을 당하여 전쟁 초기 이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국력이 쇠약해진 것은 왜란이 일어난 선조대에 이르러 비롯된 것은 아니었으며 이미 이전부터 중쇠의기운이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연산군 이후 명종대에 이르는 4대 사화와 훈구, 사림 세력간에 계속된 전쟁으로 인한 중앙정계의 혼란, 사림 세력이 득세한 선조 즉위 이후 격화된 당쟁 등으로 정치의 정상적인 운영을 수행하기 어려운 지경이었고

    군사적으로도 조선 초 설치된 국방 체제가 붕괴되어 외침에 대비하기 위한 방책으로 군국기무를 장악하는 비변사라는 합의 기관을 설치하나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이이는 남왜북호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해 십만양병설을 주장, 그러나 국가 재정의 허약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회는 점점 해이해지고 문약에 빠져 근본적인 국가 방책이 확립되지 못했습니다.

    이러할 즈음 일본에서 새로운 형세가 전개되는데 15세기 후반 서세동점에 따라 일본에는 유럽 상인들이 들어와 신흥 상업도시가 발전되어 종래의 봉건적인 지배 형태가 위협받기 시작, 이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등장해 혼란기를 수습하고 전국시대를 통일, 봉건적인 지배권을 강화하는데 전력을 기울입니다.

    국내 통일에 성공한 도요토미는 오랜 기간의 싸움에서 얻은 제후들의 강력한 무력을 해외로 방출시켜 국내의 통일과 안전을 도모하고 신흥세력을 억제하려는 대륙 침략의 망상에 빠지게 되며, 그는 대마도주 소에게 명하여 조선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 수호하도록 시켰고 그의 의도는 조선과 동맹을 맺고 명나라를 치는 것에 있었습니다.

    이에 대마도주는 가신인 다치바나 등의 일행을 일본국 사신이라는 명목으로 부산포에 보내어 통호를 청합니다.

    이 소식이 경상우수사의 치보로 조정에 전해지자 선조는 찬탈시역 한 나라에서 보낸 사신을 받아들여 접대할 수 없으니 대의로써 타일러 돌려보내라는 뜻을 비치고 2품 이상의 정신들에게 가부를 논의하도록 합니다.

    정신들의 결론은 관례대로 접대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는 것이었고 선조는 내키지 않으나 정의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치바나 일행이 서울에 올라와 바친 수교문에 오만무례한 구절이 있자 보서만 받고 사신을 돌려보내지 않은 채 회답도 보류하게 됩니다.

    일본이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해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반대하는 여론이 빗발치고 조헌은 지부상소를 올려 통신사를 일본에 보내지말 것을 극언, 그대로 해를 넘긴 조정에서는 이듬해인 1588년 문무반 2춤직과 육조의 참의 이상을 중추부에 모아놓고 가부를 재론, 그 결과 바닷길이 어두워 통신사를 보낼수없다는 쪽으로 기울어져 다치바나 일행을 그대로 돌려보냅니다.

    와중에 소가 사망하고 양자 소가 그를 승계하여 새로 대마도주가 되며 그 역시 도요토미로부터 조선 국왕의 일본 입조에 대한 독촉이 심해지자 1589년 하카와시의 세이주사 주지인 겐소와 가신 야나가와 및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신인 시마이 등과 일행이 되어 일본국왕사라 칭하고 다시 부산포에 도착합니다.

    선조는 구례에 따라 이조정랑 이덕형을 선위사로 삼아 부산포에 보내어 접대, 소 등은 부산진 객관에 머무르며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 함께 일본으로 갈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조선 국왕의 일본 입조에 대해 조선의 노여움을 두려워한 나머지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고 통신사 파견 문제를 결정짓지 못하고 소 일행은 돌아갑니다.

    대마도로 돌아간 그들은 정사에 겐소, 부사에 소를 구성해 다시 부산포로 왔고 겐소를 정사로 삼은 것은 국왕사로 위장하려는 것으로 이들을 다시 맞이한 조정에서는 이미 일본 사신으로부터 교섭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병화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받았던 터라 통신사 파견의 여부를 논의하지 않을수 없었고, 이에 정신들의 찬반이 엇갈려 결정짓지 못하던 중 왕의 전교에 따라 조선의 반민으로 일본에 거주하는 자들이 가끔 왜구의 앞잡이가 되어 변방을 소요시키니 그들을 잡아보내면 통신에 응하겠다는 것을 내세워 조선의 명분을 찾고 그들의 성의를 시험하고자 합니다.

    이에 소는 응하여 야나가와를 자국으로 보내 사화동 등 10여 인을 잡아 조선의 처치에 맡긴다 하여 이들을 모두 베어 죽였으나 이것으로도 통신사 파견을 결정짓지 못하다 보빙을 겸한 통신사를 파견, 일본의 실정과 도요토미의 저의를 탐지하는 것으로 결론을 냅니다.

    그런데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모든 것이 이에 집중되어 사행을 선정하지 못하다 11월 중순이 넘어 통신사 일행을 선정, 즉 정사에 황윤길, 부사에 김성일, 서장관에 허성으로 결정됩니다.

    통신사 일행이 돌아오려 하는데 도요토미는 답서를 주지 않아 국서를 전한지 4일 만에 경도를 떠나 사카이 포구에 와서 답서 오기를 기다리다 보름만에 받았는데 내용이 오만불손해 김성일은 그대로 가져오지 못하고 여러 곳의 문자를 고쳐 가져오게 되며 일행이 서울에 돌아온 것은 이듬해 3월, 이때 일본 사신 겐소, 야나가와 등도 따라옵니다.

    통신사 파견을 결정할 때 그 가부를 가지고 논박을 벌이고 사행이 돌아온 후 그 보고 내용을 놓고 다시 논란이 벌어지는데 서인의 정사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을 준비하고 있어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 도요토미는 안광이 빛나고 담략이 있어 보인다고 보고하지만 동인의 부사 김성일은 침입할 정형을 발견하지 못했고, 도요토미는 사람됨이 서목이라 두려워 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이때 서장관 허성은 동인이었으나 정사와 의견을 같이했고 김성일을 수행한 황진도 분노를 참지 못해 부사의 무망을 책했다고 합니다.

    이들 상반된 보고를 접한 조관들 사이에 정사의 말이 옳다는 사람, 부사의 말이 맞다는 사람들도 많았으나 동서의 정쟁이 격화된지라 사실 여하를 묻지 않고 자당의 사절을 비호하는 느낌 마저 없지 않았습니다.

    요행을 바라던 조정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결국 김성일의 의견을 쫓아 각 도에 명하여 성을 쌓는 등 방비를 서두르던 것을 중지, 선위사 오억령은 조선에 머무르고 있던 겐소 등에게 일본은 다음해 조선의 길을 빌려 명나라를 정복할 준비를 하고 있다 는 말을 듣고 왕에게 일본의 발병이 확실하다고 보고했다 파직당합니다.

    겐소 등이 그를 위문하는 황윤길과 김성일 등에게 명나라가 일본의 입공을 거절한 것을 도요토미가 분개하여 동병을 꾀하고 있으니 조선이 앞장서서 명나라에 알선해 일본의 공로를 열어줄 계획을 세우면 무사할 것 이라 하나 이를 거절, 겐소 등이 답서를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간 후 소는 다시 부산포에 와서 배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도요토미가 병선을 정비하고 침략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조선은 이것을 명나라에 알려 청화통호하는 것이 좋다 라고 거듭 변장에게 말하나 10일이 지나도록 회답이 없자 돌아갑니다.

    그 뒤 왜관에 머무르던 일본인 마저 점차 본국으로 소환되고 왜관이 텅 비게 되자 일본의 침입이 있을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김수를 경상감사, 이광을 전라감사, 윤석각을 충청감사로 삼아 무기를 정비하고 성지를 수축, 한편으로는 신립을 경기, 황해도에 , 이일을 충청, 전라도에 급파하여 병시시설을 점검,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고 백성의 원망만 높아져 갑니다.

    다만 전라좌수사 이순신만이 전비를 갖추고 적의 침입에 대처하고 있었을 뿐이고 이동안 일본의 침략 계획은 무르익어 오랜 전쟁을 통해 연마한 병법, 무예 , 축성술, 해운술을 정비, 서양에서 전래된 신무기인 조총을 대량 생산하면서 전쟁 준비에 전력을 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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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본은 막부시대에 오다 노부나가에 이어 전권을 잡은 사람이 토요토미 히데요시였습니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말잡이로 출신이 미천하였습니다. 그러나 눈치와 처세술로 최고의 지위에 올랐으나 쇼군이 되기에는 공이 그다지 크지 않았고 출신성분도 좋지 않았습니다. 이에 히데요시는 중국 명나라를 정복하겠다는 꿈을 꾸고 공을 세워 쇼군에 오르고자 했습니다. 정명가도 즉 명나라를 치려니 조선은 길을 터주라는 요구인데 당연히 조선은 이를 거부합니다. 그래서 정한론이 나오게 되어 조선을 먼저 치고 명을 공격한다는 계획으로 수정하여 임진왜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문화적으로 일본에 영향을 주어왔던 조선은 일본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삼남지방에서 노략질이나 일삼는 왜구라고만 생각해왔으며 조선 통신사로 다녀온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의 견해가 달라 미처 대비하지 못한 상황에서 임진왜란이 발발한 것입니다. 이미 왜군은 포르투갈 상인을 통해 조총을 수입하여 무장하였고 조선업과 항해술도 뛰어났습니다. 무방비상태로 있다가 거침없이 진격하는 왜군과 격전을 벌였지만 허무하게 무너져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이 있었기에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지체하게 만들고 해상에서의 승전으로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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