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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5

인조반정의 전개과정은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인조반정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된 사건인가요?

인조반정이 일어나게 된 계기는 무엇이며

인조반정의 전개과정은 어떻게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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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623년(광해군 15) 서인 세력이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인조를 조선 제16대 왕으로 등극시킨 사건을 말한다. 인조반정으로 정국을 주도하게 된 서인 세력은 이후 반정의 주도세력으로 왕권을 제약하였고, 광해군 때의 중립외교정책을 패륜으로 비판하면서 친명배금정책을 추진하였다.

    인조반정은 1623년(광해군 15) 이귀·김유 등 등 서인 일파가 정변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위(조선 제16대 왕에 등극)에 앉힌 반정사건을 말한다.

    조선의 역사상 성공한 반정은 연산군을 폐위시킨 중종반정과,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조반정이 있다. 광해군은 붕당 간의 대립이 심화된 상태에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왕권의 기반이 매우 취약했다. 이에 광해군은 1613년 왕위를 위협하던 영창대군을 제거하는 것은 물론 인목대비를 유폐시키면서 왕권의 위협 요소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특히 광해군은 중립외교로 후금과 평화관계를 유지했는데, 이는 명분을 중시하는 사림세력의 불만을 일으키게 된다. 이에 계축옥사(1613년 대북파가 영창대군 및 반대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옥사) 당시 대부분 조정에서 쫓겨났던 서인들은 사림세력의 이러한 불만을 이용해 반정을 일으키게 되었다.

    반정군이 궁내로 진입하자 광해군은 달아나 의관이던 안국신의 집에 숨었으나 곧 붙잡혔고, 군(君)으로 강등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여기에 반정군은 고관대작 40여 명을 참수하고, 200여 명을 귀양보냈다. 그리고 이후 경운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의 존호를 회복시켜준 뒤에 그 권위를 빌어서 인조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후 서인세력은 반정의 주역으로서 정국을 주도하며 왕권을 제약하였고, 광해군 때의 중립외교정책을 패륜으로 비판하면서 친명배금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후금을 자극하였고, 결국 정묘호란(丁卯胡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인조반정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23.05.26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623년 이귀, 김유 등 서인 일파가 정변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인조를 왕위에 앉힌 사건입니다.

    광해군은 즉위 후 정세 변화에 따라 왕위를 위협할지도 모를 동복형 임해군과 유일한 적통 영창대군을 경계해 임해군이 불궤를 꾀하였다는 죄목으로 진도로 귀양보냈다가 다시 교동으로 옮겼고 그 뒤 대북파 정인홍, 이이첨 등이 임해군의 처형을 주장하자 이원익, 이항복 등 중신들의 반대에도 현감 이직에게 살해하게 했습니다.

    칠서지옥을 일으키고 이를 계기로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을 죽이고 영창대군을 강화에 유폐, 선왕의 유교칠신 중 재직자인 신흠, 박동량, 서성, 한준겸을 내쫓았습니다.

    이어 영창대군을 처형하라는 주장이 일자 이이첨의 뜻을 받은 강화부사 정항이 8세의 어린 영창대군을 살해, 정원군의 아들 능창군 전을 교동에 금고했다가 살해합니다.

    대비 김씨에 대해도 계속 압박을 가하던 중 1617년 폐모론이 대두되었고 영중추부사 이항복, 영의정 기자헌 및 정홍익 , 김덕함 등이 반대하자 오히려 이들을 귀양보냈으며 그 뒤 우의정 한효순의 발론을 계기로 대비 김씨의 존호를 폐하여 다만 서궁이라 칭하고 공봉을 감하고 조알을 중지시켰습니다.

    그 뒤 실권을 행사하던 이이첨은 1622년 12월 강원감사 백대형을 시켜 이위경 등과 함께 굿을 빙자해 경운궁에 들어가 대비를 시해하려 하나 영의정 박승종 등이 급히 이르러 추방해 실패했습니다.

    서인의 이귀, 김자점, 김류, 이괄 등은 이를 이유로 무력정변을 기도하고 일찍이 함흥판관으로 있던 이귀는 북우후 신경진과 맺고 유생 심기원, 김자점과 통하여 인망이 높던 전 부사 김류를 대장으로 삼아 대북 정권을 타도하고 능양군 종을 옹립할 계획을 세웁니다.

    1622년 이귀는 평산부사, 신경진은 효성령별장으로 있었으며 평산지방에 호환이 심해 이귀는 범사냥하는 군사에게는 경계의 제한을 두지 않기를 청해 그것을 기회로 거사하려하나 이 모의가 누설되어 실패하고 다음해 그의 모계가 도하에 떠들썩하여 이귀 등은 서둘러 계획을 실천하게 됩니다.

    1623년 3월 13일 밤 이귀, 심기원, 최명길 , 김자점 등은 별력 600~700명으로 홍제원에 모여 김류를 대장으로 삼고 능양군은 친병을 거느리고 고양 연서역에 나아가 장단부사 이서의 병력 700여명과 합류합니다.

    먼저 창의문을 돌파하고 창덕궁으로 가 궁중에서 연회가 한창이던 광해군은 반군이 대궐에 들어간 뒤에야 피신, 그러나 반군의 횃불이 창덕궁의 제전에 인화되어 모두 불탔고 능양군은 보새를 거두어 경운궁에 유폐중인 대비 김씨에게 바치니 대비는 광해군을 폐하고 능양군을 즉위시켰습니다.

    광해군은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었으나 체포되었고 대비 김씨는 광해군의 죄를 들어 처형하려 하였으나 새왕의 간청으로 서인으로 내리는 동시에 강화로 귀양, 대북파의 이이첨, 정인홍, 이위경 등 몇십명을 참형에 처하고 200명을 귀양보냈으며 반정에 공을 세운 서인의 이귀, 김류 등 33명은 세 등급으로 나누어져 정사공신의 훈호를 받고 각기 등위에 따라 벼슬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논공이 공평하지 못해 서인간에 다소의 반복이 있었고 1년 뒤 이괄의 난을 초래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해군이 임해군,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위시킨 폐모살제(廢母殺弟)의 패륜 행위는 김류, 김자점, 이귀, 이괄, 심기원 등 서인들에게 좋은 명분이 되어주었다. 1620년(광해군 12년) 신경진과 김류가 처음으로 반정을 모의하기 시작했고, 이서와 이귀·김자점·최명길과 그의 형 최내길 등이 이에 동조했다. 1623년 4월 11일(음력 3월 12일) 밤, 능양군을 주축으로 한 서인 세력이 반정을 일으켰다. 이이반이 도중에 밀고하였으나, 예정대로 거사는 실행에 옮겨졌다.

    -출처:위키백과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인조반정은 광해군의 지지 기반인 대북 전체가 타 정파의 공공의 적이 된 판이라 이들 전부를 타깃으로 삼았고, 상당수 북인을 제거했다. 물론 100% 전멸한 것은 아니지만 대북 계열은 '학맥'의 중심이 되는 인물들이 제거당했기 때문에 사실상 당파로서는 완전히 소멸. 적어도 기축 옥사와 계축 옥사는 물론이고 후대 숙종 대의 환국이 한쪽 붕당이 실각하는 수준에서 끝난데 비해 인조반정은 그야말로 대북, 더 나아가서 북인 자체를 역적 취급해 씨를 말렸기에 인조반정이 비판을 받는 원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