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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듯한매미13
반듯한매미1323.01.12

옛날에 내시의 선발 기준이 궁금합니다

옛날에 궁에서 임금을 모시던 내시는 어떻게 뽑았는지 궁금합니다

지금말로 공채로 선발을 한건가요?

아니면 특별한 기준이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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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김보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환관과 내시를 어느 정도 구분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내시는

    거세를 하고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은

    내시가 아니라 환관 입니다.

    그리고 내시는 거세도 하지 않았고

    똑똑한 사람들이 많아서

    요즘으로 치면 비서역할까지도 했습니다.

    워낙 드라마에서 그렇게 나오다 보니 이미지가 굳어진 것 같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어린 내시가 입궁하면 자질을 시험하였는데, 주로 인내력에 관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모진 육체적 고통을 수반하는 극한 상황에서도 참고 견딜 수 있어야만 하였다고 하지요. 이런 과정을 거쳐 들어온 어린 내시를 소수(小豎) 혹은 소환(小宦)이라 하였는데, 일종의 견습 내시인 셈이지요. 궁궐 청소와 잔심부름, 때로 는 대전에서 왕을 모시는 중요한 임무까지도 실습한 내시는 비상시 비밀 통로를 통해 왕을 업고 탈출하는 연습을 하였 다고도 전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시대 내시는 환관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고려시대는 '제3의 성'이라 불리는 환관이 아닌, 문관들로 구성된 내시가 따로 있었다. 이들은 가문과 학식, 재능이 뛰어나기 때문에 선발된 국왕 측근 엘리트집단이었다. 우리나라 사립대학의 창시자인 최충(崔忠)의 손자인 최사추(崔思諏),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金富軾)의 아들 김돈중(金敦中), 주자학을 도입하고 국립대학인 성균관의 진흥을 꾀한 안향(安珦) 등은 모두 학문적, 관료적 능력을 인정받아 내시직을 역임한 인물들이다. 고려내시들은 여러 근시(近侍)들과 함께 왕의 행차에 동행하였을 뿐 아니라 왕명의 초안 작성, 유교경전의 강의, 왕실재정 관리를 하였으며 때로는 국왕을 대신하여 궐 밖 민정을 살피기도 하였다.

    고려시대 내시가 언제, 어떠한 조직로 설치되었는지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 가장 앞선 기록은 918년(태조 1) 오늘날 부총리급에 해당하는 광평시랑 직예(職預)를 내시서기(內侍書記)로 삼았다는 『고려사』 세가 기록이다. 내시의 선발기준이 보다 분명해진 때는 11세기 문종 때이다. 재능과 공로가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용모가 수려한 문인 20명을 내시로 뽑아 시종케 하였으며, 근무대가로 별사미(別賜米)를 주었다.


    그 후 12세기 의종 대에 이르면 귀족자제들로 구성된 좌번내시와 유신(儒臣)들로 구성된 우번내시의 이원조직을 갖게된다. 그런데 국왕의 근시직이었던 만큼 내시가 되는 중요한 요건은 국왕의 총애가 우선이었다. 따라서 과거합격자가 아니더라도 실무능력을 인정받아 내시가 되기도 하고, 의술, 점술, 잡기 등으로 내시로 발탁되기도 하였다. 무신집권기에는 비로소 무신도 내시가 될 수 있었다.


    한편, 고대 갑골문자에도 보이는 환관의 존재가 우리나라 기록에서는 826년(신라 흥덕왕1)에 처음 보인다. 고려시대에도 국초부터 환관이 있었으나 규모는 10여 명에 불과하였다. 역할은 '왕명전달'이 아니고, 주로 궁궐 청소와 궁녀들의 관리를 맡았다. 왕의 총애를 받아 승진한다 하여도 7품까지 밖에 오를 수 없었다. 물론 의종의 특별한 신임을 받았던 환관 정함이 내시가 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환관이 내시가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14세기 원간섭기, 출세한 환관들이 많아지고 궁궐 내 환관에 대한 역할이 늘어나자 내상시, 내시감, 내승직, 내급사 등 정2품부터 종9품에 이르는 환관들만의 부서를 갖게 되었다. 바로 1356년(공민왕 5)에 121명의 정원을 가진 내시부(內侍府)가 창설된 것이다.


    이처럼 고려 말 환관들만의 내시부가 만들어진 것과 반대로 선망의 대상이었던 내시는 군 복무 대신에 들어가 궁궐을 숙위하는 성중관(成衆官)으로 위축되었다. 선발조건은 여전히 가문과 재능과 용모를 따졌지만 조선 초 1466년(세조 12) 폐지될 때까지 궁중 숙위의 기능만 가졌을 뿐이었다.


    (출처:http://opendic.naver.com/100/entry.php?entry_id=58534)


    조선의 내시부



    내시부는 환관(宦官)의 부(府)로서

    왕 및 왕비전(王妃殿) 그리고 세자와 세자빈궁(世子嬪宮) 등에서

    식사의 감독 · 명령의 전달 · 수문(守門) 및 청소 등을 맡았다.

    정원은 140명으로 상선(尙膳, 종2품) 2명, 상온(尙춠, 정3품) 1명,

    상다(尙茶) 1명, 상원(尙苑, 종9품) 등 59명만이 관직을 갖고 있었고

    그 나머지는 관직이 없었다.


    http://seoul600.visitseoul.net/seoul-history/munwhasa/txt/text/4-3-1-2-1-1-3.html



    상선(尙膳) 2인 이조(吏曹)의 속아문(屬衙門) 내시부의 으뜸 벼슬이며, 임금·비빈(妃嬪)·대비(大妃)·왕세자의 식사에 관한 일을 관장하고, 내시부의 관원을 감독.


    상온(尙춠) 1인 궐내 술빚는 일을 관장


    상다(尙茶) 1인 궐내 왕과 비빈등 왕족에게 차를 대접하는 일을 관장



    상약(尙藥) 2인 궐내 탕약을 관장


    상전(尙傳) 1인 왕명의 전달


    상책(尙冊) 3인, 궁중에서 쓰이는 서적을 관리하는 일


    상호(尙弧) 4인 궐내 무기창고 관장


    상탕(尙帑) 4인, 궁궐 재화관리


    상세(尙洗) 4인, 궁궐안의 왕족의 세숫물 목욕물 관장


    상촉(尙燭) 4인, 궁내 등불의 관리, 소화,


    상훤(尙煊) 4인, 궁내 아궁이등 각 방의 난방을 관장


    상설(尙設) 6인, 휘장·인석(茵席)·장설(張設) 등에 관한 일

    상제(尙除) 6인,

    상문(尙門) 5인 궁궐 문을 지킴


    상경(尙更) 6인 왕의 곁에서 잡다한 시중을 든다.


    야간에 시각을 알려주는 일을 함.


    상원(尙苑) 5인 궁중의 정원을 가꿈


    등입니다.

    그밖에 이속으로 서원 2인과 사령 1인이 있었고요.


    궐내 음식물 감독, 왕명 전달, 궐문 수직, 청소 등이라고 규정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궐내의 모든 잡무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내시부 관원으로서 4품 이하는 문·무관의 근무일수에 의거하여

    품계를 올려 받았으나, 3품 이상은 왕의 특지가 있어야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근만(勤慢)에 대한 규찰은 승정원에서 담당하였다.

    조선시대의 내시부는 고려의 제도를 본받은 것이었지만,

    내시의 폐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그 세력을 철저히 통제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성종 1년(1469) 내시부직은 4품을 넘지 않도록 제한한 것은 좋은 예이다.

    이후로도 조선 전시기를 통하여 내시에 대한 규제론은 끊이지 않았으며

    실제 내시의 세력은 미약하였다.


    (출처:http://opendic.naver.com/100/entry.php?entry_id=1417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