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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태양새285
탁월한태양새28523.05.19

임오군란이 일어나게 된 이유와 시대적 상황은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임오군란이 일어나게 된 구체적인 이유는 어떻게 되나요?

그리고 임오군란이 일어나게 된 그 시기쯤에 시대 상황은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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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3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19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곱 걸음 걷는 동안에 지은 시. 삼국 때 위 문제(魏文帝, 조비曹丕)가 동생 동아왕(東阿王, 조식曹植)을 미워하여, 7걸음 걷는 사이에 시를 지으라 명하니 동아왕이 즉시 짓기를, ‘煮豆持作羹 漉豉以爲汁 萁在釜底然 豆在釜中泣 本是同根生 相煎何太急(자두지작갱 녹시이위즙 기재부저연 두재부중읍 본시동근생 상전하태급 ; 콩을 쪄 국 만들고 콩자반 걸러 즙으로 하려는데, 콩깍지는 솥 아래서 타고 콩은 솥 안에서 울고 있구나. 본디 한 뿌리에서 났는데, 불 때어 달이기를 어찌 서두르는고.)’이라 하매, 문제가 아주 부끄러워했음.<세설신어世說新語 문학文學>

    *이 시를 ‘칠보시(七步詩)’라고도 하고, 시나 글을 빨리 짓는 재주를 ‘7보재(七步才)’라 하게 되었음.

    [네이버 지식백과] 칠보지시 [七步之詩] (한시어사전, 2007. 7. 9., 전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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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임오군란은 1882년(고종 19) 6월 9일 훈국병들의 군료분쟁에서 발단해 고종 친정 이후 실각한 대원군이 다시 집권하게 된 정변이다. 무위영 소속 군병들에게 양이 절반밖에 안 되고 겨와 모래가 섞인 군료를 지급한 것이 발단이었다. 소요가 일어나자 민겸호는 주동자를 혹독하게 고문한 후 처형케 했다. 이에 격분한 군병들이 통문으로 결집을 호소하여 대규모 폭동으로 발전했다. 척신·관료의 집을 습격하고 마침내 궐내로 난입해 이최응·민겸호·김보현을 살해했다. 고종은 대원군에게 사태수습을 맡기지 않을 수 없었고 대원군은 다시 정치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군란의 배경을 단지 민씨척족정권에 대한 대원군을 중심으로 한 수구파의 정쟁으로만 볼 수는 없다.

    고종을 비롯한 민씨척족정권이 개화정책을 추진해 일본과 구미제국과의 교섭통상관계가 이루어지면서 개화파와 수구파의 반목이 점차 심해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개화파주1 관료가 제도 개혁에 따라 대거 등장하자 수구파주2의 반발이 격화되었다.

    특히, 5영을 폐지한 후 무위 · 장어의 2영을 설치하고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는 등 군제 개혁이 단행되자 구 5영소속 군병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1881년 전개된 수구파의 위정척사론주3과 이재선 · 안기영등의 토왜반정음모사건을 계기로, 민씨척족정권은 대원군파와 특히 남인계열의 수구파에 대대적인 탄압을 가함으로써 지배층의 분열은 극도에 달해 있었다.

    이 밖에도 민씨척족정권의 인사행정의 문란, 매관매직, 관료층의 부패 및 국고의 낭비, 일본의 경제 침략으로 인한 불만 등을 군란의 배경으로 들 수 있다.

    임오군란이 일어나기 전에도 수 차에 걸친 군병들의 반항이 있었다. 1863년(철종 14)의 금위영 소속 군병의 소요, 1877년 8월의 훈국병 소요 등은 모두 군료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임오군란이 일어난 직접적인 원인도 군료 문제에 있었다.

    군제 개혁 후 구 5영 소속 군병의 대부분은 실직하였다. 또 무위영과 장어영으로 개편된 군병이라 할지라도 신설된 별기군에 비해 열악한 대우에 처해 있었습니다.

    더욱이 이들 구 5영소속의 군병들은 13개월이나 군료를 받지 못하고 있어 불만이 절정에 달해 있었다. 특히, 그들은 군료 관리인 선혜청당상 민겸호와 전 당상이었던 경기관찰사 김보현(金輔鉉)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습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임오군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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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76년 맺어진 한일수호조약으로 인해 대원군이 취한 쇄국정책이 무너지고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이 일어나며 이 가운데 왕의 친정으로 정권을 내놓은 대원군은 척족인 민씨일파를 내치고 다시 집권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신식군대를 양성하는 별기군이 급료와 보급에서 좋은 대우를 받는데 비해 구식군대인 무위영, 장어영 2영의 군졸들은 13달동안 봉급미를 받지 못해 불만이 있었고 한달치 급료를 받으나 그것마저 선혜청의 고지기의 농간으로 말수가 부족하고 모래가 반 넘어 섞여있어 이에 격분한 구식군졸들이 고지기를 때려 부상을 입히고 선혜청 당상 민겸호의 집으로 몰려가 저택을 파괴하고 폭동을 일으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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