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검색 이미지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06

붕당정치 시기에 예송논쟁에 대해서 알기 쉽게 설명부탁드립니다.

문제가 많았던 붕당정치 시기에 있었던 예송논쟁에 대해서 스스로 정리를 해보려는데

체계가 잡히질 않습니다.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지 설명부탁드립니다.

55글자 더 채워주세요.
답변의 개수
6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시대에 성리학의 예법을 어떻게 풀이할지를 두고 학자와 정치인들이 벌인 논쟁입니다. 논쟁이 된 주제는 “왕이나 왕비가 죽었을 때, 어머니나 시어머니인 대비가 상복을 얼마 동안 입는 것이 알맞은가?”였다. 예송 논쟁은 학문적 논쟁인 동시에 서인과 남인의 권력 다툼이었습니다.

    예송 논쟁은 크게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첫 번째 논쟁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왕위에 오른 효종이 죽자 그 어머니인 조대비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를 두고 일어났다.

    서인은 효종이 조대비의 둘째 아들이므로 성리학의 예법에 따라 1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자가 정리한 ‘가정에서 지켜야 할 예법(주자 가례)’에는 장자가 죽었을 경우, 부모는 3년 동안 장례의 예를 갖춰야 하고, 차남 이하는 1년간 해야 한다고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남인은 효종이 비록 둘째 아들이지만 임금이 되었으므로 장남과 같이 대우하여 3년(만 2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맞섰다. 결국 조대비가 상복을 입는 기간은 1년으로 결정되었고, 논쟁에서 승리한 서인이 정치의 주도권을 잡았다.

    두 번째 논쟁은 효종의 아들이었던 현종이 임금이 된 후에 효종의 왕비였던 인선 왕후가 죽자 시어머니인 조대비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를 두고 벌어졌다. 주자 가례에는 첫째 며느리의 경우는 1년, 둘째 며느리에게는 9개월간 장례의 예를 치르도록 하고 있다. 서인은 인선 왕후가 조대비의 둘째 며느리이므로 성리학의 예법에 따라 9개월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남인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효종이 둘째 아들이라도 임금이 되었으므로 장자로 대우해야 하며, 인선 왕후에게도 장자의 며느리에 해당하는 예를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에서는 조대비가 1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고, 논쟁에서 승리한 남인과 이에 동조한 세력이 권력을 잡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예송 논쟁 - 성리학의 예법을 어떻게 풀이할지를 두고 벌인 논쟁 (한국사 사전 2 - 역사 사건·문화와 사상, 2015. 2. 10., 김한종, 이성호, 문여경, 송인영, 이희근, 최혜경, 이승수)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659년(현종 즉위)에 일어난 1차 예송 논쟁인 기해예송은 효종의 죽음으로 인해 효종의 계모인 장렬왕후가 기년복을 입을 것인가, 3년복을 입을 것인가를 두고 벌인 논쟁이었습니다. 주자가례에 따르면 장자가 죽으면, 그 어머니는 3년복(만2년)을 입고, 차자 이하 아들이 죽으면 기년복(1년)을 입도록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서인은 효종이 소현세자의 동생이므로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남인은 국왕의 지위를 갖고 있는 효종은 일반 백성의 예와는 다르게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효종을 장자로 볼 것이냐, 차자로 볼 것이냐는 국왕의 지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국왕과 함께 사대부를 통치의 주체자로 인정하는 서인 측은 천하동례를 주장하여 국왕의 특별한 지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성리학 이 외의 육경 고학을 두루 섭렵했던 남인 측은 ‘왕자례부동사서’, 곧 왕의 지위에 있는 사람의 예는 사대부와 일반 백성과는 다르다고 주장하여 왕권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인정하였습니다.


    기해예송 때는 경국대전에서 장자와 차자 모두 기년복을 입는다는 규정에 따라 장렬왕후는 1년 동안 상복을 입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서인이 승리하였으나 효종의 지위 문제가 완전히 마무리되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문제가 다시 불거질 수 있었습니다. 결국 1674년(현종 15) 효종 비 인선왕후의 죽음으로 또다시 장렬왕후가 상복을 입어야 하는 상황에서 복상 기간을 둘러싼 2차 논쟁, 갑인예송이 벌어졌습니다.


    장자의 며느리가 죽었을 경우에는 기년복을, 차자의 며느리가 죽었을 때는 9개월만 상복을 입는 대공복을 입어야 하는 상황에서 또다시 복상 기간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현종은 효종을 차자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공표하면서 남인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이는 숙종 즉위 초 남인 정권이 들어서는 배경이 되기도 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23.05.06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예송논쟁은 현종때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의 상례 문제를 둘러싸고 남인과 서인 두 차례에 걸쳐 대립한 사건으로 1차는 1659년 효종이 죽자 효종의 어머니 조대비의 복상을 서인의 뜻에 따라 기년으로 정했는데 이에 대해 남인 허목, 윤휴 등이 이의를 제기하며 일어납니다.

    이들이 효종은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장자나 다름없으므로 3년으로 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는데 비해 송시열 등 서인은 효종은 인조의 둘째왕자이므로 장자의 예로 할 수 없다고 반박, 결국 서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집니다.

    2차는 74년 효종의 비가 죽자 다시 조대비의 복상을 몇년으로 할 것인가를 두고 일어납니다.

    당시 집권층인 남인은 기년으로 정했는데 이에 대해 서인은 대공설을 주장하나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집니다.

    이러한 논쟁은 단순히 복상 문제를 둘러싼 당파의 대립이 아니라 왕권을 어떻게 위치 지을 것인가에 대한 정치적 입장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효종이 둘째 아들이라서 장자의 예를 따를 수 없다는 서인의 견해는 왕권도 일반사대부와 동등하게 취급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신권의 강화를 꾀하려는 입장이며 비록 둘째 아들이지만 왕은 장자의 예를 따라야 한다는 남인의 견해는 왕권을 일반사대부의 예와 달리 취급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왕권강화를 통해 신권의 약화를 꾀하려는 입장이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 분야, 재무설계 분야, 인문&예술(한국사) 분야 전문가, 지식iN '절대신 등급' 테스티아입니다.

    ✅️ 두 차례 예송논쟁에서 각각 자의대비가 어느 정도 기간의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 남인과 서인세력의 대립이 존재했으며 첫째 기해예송에서는 서인이, 둘째 갑인예송에서는 남인이 승리하였습니다. 즉, 이는 예론이었지만 사실상 정치 주도권을 놓고 벌인 정쟁이 됩니다.

    - - - 추가적으로 궁금하신 점은 의견으로 남겨주시면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성의껏 답변을 드려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 -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지금이야 사실 상을 당하면 거의 다 검은 옷을 입고 3일장을 치루지만 유교를 숭상하는 조선의 그것도 궁에서는 이러한 장례문화가 굉장히 중요시 여겨 졌습니다. 예송 논쟁이란 효종 승하 후, 현종 즉위 직후 효종의 의붓 모후인 장렬왕후가 행해야 했던 상례 격식을 두고 서인과 남인 간에 여러 차례 격렬하게 벌어졌던 학술적, 정치적, 사회적 논의를 말합니다. 1차(기해예송 1659년)는 효종이 사망한 이후, 모후인 장렬왕후가 입어야 하는 상복 '규례'를 두고 일어난 논쟁이고 2차(갑인예송 1674년)는 장렬왕후가 며느리 되는 인선 왕후에 대해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느냐로 벌인 논쟁입니다.(현종 15년).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

  •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659년(현종 즉위)에 일어난 1차 예송 논쟁인 기해예송(己亥禮訟)은 효종의 죽음으로 인해 효종의 계모인 장렬왕후가 기년복(朞年服)을 입을 것인가, 3년복을 입을 것인가를 두고 벌인 논쟁이었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르면 장자(長子)가 죽으면, 그 어머니는 3년복(만2년)을 입고, 차자(次子) 이하 아들이 죽으면 기년복(1년)을 입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서인은 효종이 소현세자의 동생이므로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남인은 국왕의 지위를 갖고 있는 효종은 일반 백성의 예(禮)와는 다르게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예송은 상복을 입는 기간을 둘러싸고 벌인 서인과 남인의 논쟁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상복을 두고 벌인 공리공담(空理空談)이 아니었으며, 당시 지배 이데올로기인 성리학, 효종의 정통성, 왕권과 신권의 관계 등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서 오는 중대한 정치 현안이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