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세자는 어떤 인물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소현세자는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소현세자의 생애,살아온 과정은 어떻게 되며
소현세자가 있던 시대적 상황은 어떠했나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제16대 임금 인조와 인열왕후 한씨의 장남. 효종, 인평대군, 용성대군의 친형이며 전주 이씨 소현세자파의 파시조이다.
승정원일기가 전산화되기 이전 실록에 의존해야 했을 때 이덕일이 제시한 수많은 독살설 중에 실록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되었고, 인조의 행동 때문에 연구자들도 한때 독살을 비롯한 타살 가능성에 동의했던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가 소현세자다. 실록에만 의존하던 시절, 타살 근거는 다음과 같았다.
청나라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소현세자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내의원에서는 세자의 병이 학질(말라리아)이라고 했다. 침을 놓는 시술이 시작됐지만, 소현세자는 불과 사흘 만에 창경궁 환경전에서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러나 세자의 죽음은 의문투성이였다. 일단 '학질(말라리아)'이라는 병이 의심스러웠다. 모기를 통해 감염되는 말라리아는 여름에 걸리는 전염병인데, 세자는 늦겨울 2월에 돌아왔기 때문이다. 병증이 학질이 맞다 하더라도 약 처방이 아닌 침을 놓는 시술을 시행한 것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소현세자는 이렇다 할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청국에서 돌아온 지 두 달만에 숨을 거뒀다. 그래서 소현세자가 독살당했다는 건 한때 학계 정설로까지 굳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방대한 승정원일기가 전산화되고, 세자의 질병을 상세히 기록한 심양일기와, 시강원 스승들이 작성한 소현세자의 학창생활, 즉, 2만 페이지에 달하는 소현동궁일기의 국역과 출간이 이뤄진 시점에 당시 정세를 단편적으로나마 훨씬 디테일하게 엿볼 수 있게 되어, 의학적 관점에서의 연구도 더해졌다. 이후, 위의 추론된 근거만으론 독살을 단언할 수 없게 되었고, 대신 다른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평소 지병이 있던 소현세자가 17세기 한의학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지병의 급성 악화로 사망했고, 당시 인조는 그런 상황을 철저히 이용했다는 것이다. 다만, 소현세자의 돌연사를 유발한 그 지병이 무엇이었는지 규명하는 것 역시 17세기 의학 기록의 한계로 결국 추론의 영역에 머물게 되었고, 워낙 인조, 혹은 소용 조씨가 소현세자를 숙청하고도 남을 맥락과 앞뒤 정황이 있다 보니, 독살, 혹은 타살설 역시 정황상, 그리고 대중적으로는 설득력을 잃진 않은 상태다.출처: 나무위키 소현세자/생애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소현세자는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9년 동안 청에서 볼모 생활을 하였고요,
조선에 돌아온 후 사망하였지요
소현세자의 이름은 왕(炡)이며, 1612년(광해군 4년) 1월 4일 당시 아직
능양군이었던 인조의 맏아들로 태어났어요
이름이 왕 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의 왕세자이며 인조와 인열왕후의 장남이며 효종의 형입니다.
그 시대는 청나라에게 나라가 짓밟히며 왕족들은 대부분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성은 이 , 이름은 왕이며 시호는 소현입니다. 조선의 제 16대 왕 인조의 맏아들로 태어나 어머니는 한준겸의 딸인 인열왕후 한씨이며 1627년 강석기의 딸 민회빈 강씨와 혼인해 경선군 이석철, 경완군 이석린, 경안군 이석견, 경숙군주, 경녕군주, 경순군주 등 3남 3녀를 두었습니다.
소현세자는 1612년 음력 정월 4일에 태어나 1625년 정월에 왕세자로 봉해졌으며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이원익, 신흠과 함께 전주에 내려가 분조의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무군사를 설치, 전쟁이 끝나자 강화도로 피신한 인조를 호위해 한양으로 돌아왔고 그해 12월 참의 강석기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했습니다.
1635년 모친인 인열왕후가 죽어 상을 치르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신, 이듬해 2월 세자빈과 함께 인질이 되어 청나라의 수도였던 성경으로 끌려간 후 소현세자는 1640년 과 1644년 봄 인조의 병문안을 위해 잠시 귀국했을 때를 빼고 9년동안 청나라에 억류되어있었습니다.
1644년 청나라가 산해관을 넘어 명나라의 수도인 베이징을 점령하자 그해 가을 베이징으로 옮겨졌고 1645년 음력 2월 억류에서 풀려나 귀국할수 있었습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인질로 억류되어있으면서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외교 창구 역할을 했고 병자호란 당시 조선은 청나라에게 명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벌할때 지원군을 파병하겠다는 등의 약속을 했으나 오히려 친명배청의식이 강화되어 청나라와 자주 외교적 마찰을 빚었습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황제의 행사와 사냥 등에 참석해 청나라 고위인사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 조선인 포로의 속환문제와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병력 지원요구 등 여러 정치, 경제적 현안을 맡아 처리했습니다.
베이징에 있을 때 독일의 예수회 선교사이자 천문학자인 아담 샬과 교류하며 천구의와 천문서, 천주상등을 선물받았고 당시 소현세자와 아담 샬이 주고 받은 편지 내용은 라틴어로 번역되어 전해지는데 그 편지에서 소현세자는 서학의 보급에 강한 의지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1645년 음력 2월 귀국한 소현세자는 그해 음력 4월 26일 창경궁의 환경전에서 갑자기 죽었고 고양의 소경원에 매장되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소현세자가 병이 갑자기 위독해져 죽었다고 기록되어있으나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가 염습에 참여하고 나와 시신이 온통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에서 모두 피를 흘리고 있어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것 같았다는 증언을 남겼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억류되어있을 때 포로로 잡혀간 조선 사람들을 모집해 둔전을 경작해 곡식을 쌓아 두고 그것을 진기한 물품과 무역을 한 것을 인조가 못마땅하게 여겼고 인조에게 총애를 받던 소용 조씨가 세자와 세자빈을 헐뜯어 소현세자가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실제 소현세자가 죽은 뒤에 인조는 세손인 이석철이 있는데도 소현세자의 동생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았고 당시 영의정 김류 등 대신들이 반대했는데도 인조는 봉림대군을 세자로 봉했고 이듬해 1646년 소용 조씨를 저주하고 임금의 음식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로 소현세자의 세자빈 강씨를 죽였으며 1647년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모두 제주로 유배보냈습니다.
당시 12세와 8세였던 이석철과 이석린은 이듬해 제주도에서 죽었고 4세였던 이석견도 효종 때 1656년에야 유배에서 벗어날수 있었습니다.
인조가 소현세자의 세자빈과 자식들에게도 무자비하게 대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소현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에 인조가 관련되어있는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후기 제16대 인조의 첫째 아들인 소현세자는 1612년(광해군 4)에 태어나 1645년(인조 23)에 사망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삶을 살다간 소현 세자는 병자호란으로 굴욕적인 항복을 한 후 자진해서 봉림대군 등과 같이 심양에 인질로 갔다고 합니다. 심양에서 9년 동안 생활하면서 청의 존재를 인정하고 청의 왕족 및 장군들과 친교를 맺고 양국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노력했습니다. 서양문물 수용에도 적극적이어서 귀국할 때 관련 서적과 물자들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는 조정의 부정적 평가를 불러왔고 급기야 부왕과 갈등을 빚다가 병석에 누운 지 4일 만에 급사하고 부인 및 가족들도 죽음을 당했다고 합니다. 인조와 소현세자의 갈등과 죽음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가상의 이야기를 가미한 픽션 영화 <올빼미.>가 작년에 한국에서 상영 되기도 했었지요.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소현세자는 조선후기 제16대 인조의 첫째 아들인 왕자입니다. 1612년(광해군 4)에 태어나 1645년(인조 23)에 사망했습니다. 병자호란으로 굴욕적인 항복을 한 후 자진해서 봉림대군 등과 같이 심양에 인질로 갔습니다. 심양에서 9년 동안 생활하면서 청의 존재를 인정하고 청의 왕족 및 장군들과 친교를 맺고 양국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노력했습니다. 서양문물 수용에도 적극적이어서 귀국할 때 관련 서적과 물자들을 가져왔습니다. 이는 조정의 부정적 평가를 불러왔고 급기야 부왕과 갈등을 빚다가 병석에 누운 지 4일 만에 급서하고 가족들도 죽음을 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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