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갸름한칠면조122
갸름한칠면조12223.06.28

김구 선생님이 젊은 시절 일본인을 왜 죽인건가요?

우리나라의 위인인 김구 선생님이 일명 치하포 사건으로 젊은 시절 일본인을 살해한 일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스파이로 오해해서 죽였다고 알고 있는데 새롭게 밝혀진 역사적 사실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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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96년 3월 김구가 무장상태의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를 살해한 치하포 사건은 백범일지의 기록에 의해 김구가 명성황후 시해 이후 일본 군인을 죽인 의거라고 알려져있습니다.

    김구는 국모를 시해한 일본인을 살해하여 원수를 갚고자 한 것이라 주장, 살해 후 그가 일본군 장교라는 것을 알게되었다고 말하는데 일본측의 기록에는 쓰치다 조스케가 쓰시마 섬의 이즈하라 출신 상인이며 계림장업단이라는 상회에 소속되어있었다고 합니다.

    을미사변 관련인을 처단한 것이라는 김구의 증언과 계림장업단 소속의 약재상을 살해하고 엽전 800냥을 갈취했다는 일본 측의 기록에는 모두 당시 정황과 어울리지 않는 부분으로 논란이 되는 사건이며, 사건 당시 을미사변에 관련된 일본인들은 일본 형무소에 수감되어있던 관계로 김구의 증언이 잘못되었다는 의견이 있으며 이 사건은 1896년 3월 9일인데 그 살해당했다는 상인이 소속되어 있다는 계림장업단이 생겨난 것은 1896년 5월 17일인 오류가 있으며 엽전 800냥도 김구가 가져간 것이 아니라 주막 주인이 그대로 갖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일본이 정치적 필요에 따라 이 사건을 우발적인 강도살인으로 왜곡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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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28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95년 10월 일본군과 낭인(浪人)들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나고 뒤이어 친일 갑오개화파 정권에 의해 단발령이 선포되자 그에 저항하는 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얼마 후인 1896년 2월 11일에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이어졌다. 김구(金九)는 전 동학 농민군 지도자 김형진(金亨振) 등 동지와 더불어 청국으로 가 중국 북동부 지역의 반일 인사들과 연합 작전을 준비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 발걸음을 되돌리게 되었다.

    김구는 1896년 3월 8일 평남 용강군(龍岡郡)에서 배를 타고 인접한 황해도 안악군(安岳郡) 치하포(鵄河浦)로 가서 이화보(李化甫)가 운용하는 여점(旅店)에 머물게 되었다. 그는 마침 같은 여점에 있던 일본인 스치다 조스케를 다음 날인 3월 9일 새벽 3시 경에 살해하였는데, 이것이 치하포사건이다.


    무역상인 또는 약장사[賣藥商人]로도 언급되는 스치다를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 육군중위로 판단한 김구는 그를 타살했다는 포고문과 함께 자신의 거주지와 성명을 써 놓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치하포사건이 일어난 3월 9일 당일, 스치다를 수행했던 조선인 통역 임학길(林學吉)이 평양으로 도피하여 그 곳에 있던 일본 경성영사관 경부(警部) 히라하라 아쓰무[平原篤武]에게 신고하였다.

    이에 히라하라는 3월 15일 치하포사건 현장에 도착하여 지방관에게 범인의 체포를 의뢰하였고, 일본영사관도 외부(外部)에 신속한 범인 체포를 촉구하였다. 그 결과 안악군 보고를 토대로 해주부는 범인이 김창수(金昌洙: 김구의 아명)임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소극적인 조선 정부의 입장에 따라 김구의 체포는 몇 달 동안 지연되었다. 이에 일본영사관은 6월 5일부터 27일 사이에 3명의 순사를 평양 지역에 파견하여 사건 조사를 실시하였다. 결국 피신 중이던 김구는 6월 말 해주부에서 체포되었다.


    해주부에서는 곧바로 심문을 개시하였다. 그런데 일본영사관은 인천항재판소에 치하포사건은 외국인의 생명과 관계되는 사건이므로 외국인 관련 재판을 담당하는 인천감리서에서 심문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조회하였고, 그 내용을 인천항재판소가 외부에 전달하였다.

    그 결과 해주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김구는 인천감리서로 압송되어 이곳에서 8월 31일, 9월 5일, 9월 10일 세 차례에 걸쳐 일본인이 배석하는 합동 신문을 받게 되었다.


    3차례의 진술[공초(供招)]에서 김구는 스치다 살해 동기와 살해 방법을 밝혔는데, 동기는 ‘국모의 원수에 대한 복수’를 하고 나라의 수치를 조금이나마 씻고자 하는 것이며, 방법은 발로 차 마당에 쓰러뜨리니 그가 칼을 뽑기에 돌로 쳐 넘어뜨리고 칼을 빼앗아 죽였다고 주장하였다.

    일본영사 대리 하기와라 슈이치[萩原守一]는 9월 12일 ‘대명률(大明律)의 인명모살인죄(人命謀殺人罪)’로 김구를 참형(斬刑)으로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법부에서는 임금에게 마땅히 상주하여 칙명을 받아야 할 사안이라는 답전을 인천감리에게 보냈다.


    그로부터 20일 뒤인 10월 22일 법부는 김구에 대한 교형(絞刑)을 국왕에게 건의하였다. 그러나 국왕이 이를 재가하지 않았고, 이후 12월 31일 상주안건을 거쳐, 김구가 제외된 1897년 1월 22일 최종 상주안건이 재가되어 김구는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


    이후 수감 생활을 이어가던 그는 1898년 3월 19일 탈옥을 감행하여 성공하였고, 아버지가 대신해서 수감되었다가 그로부터 1년 후인 이듬해 3월 석방되었다.

    치하포사건은 을미사변과 갑오개혁, 단발령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 속에서 격화되는 조선인의 반일감정과 투쟁의식을 보여준다. 또 ‘국모의 원수를 갚기위해’ 라는 명분을 내건 김구의 의거에 대해 조선 정부 및 고종황제의 소극적 처벌의지는 침략자 일본에 대한 최소한의 저항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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