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학은 언제부터 사용했나요?
과거 관상을 이용해서 사람의 성격이나 일 처리 능력을 판단하고 하던데요. 이런 관상학은 언제부터 생긴 학문이고.
누가 연구했나요?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관상학이 알려진 것은 2000여년 전부터입니다.
고대의 유명한 관상가로는 관로, 허소 등이 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연대는 정확하게 알수가 없습니다 대략적으로 기원전 21세기 이전의 하나라의 요임금과 순임금이
인재를 등용할때 관상을 활용했다는 문헌이 있다 인도 에서는 석가의 탄생과 관련된 일화도 관상법이
활용된걸로 본다 관상의 기원은 이보다 더 오래 된것으로 보고 있는데 흔히 관상학의 기원을 논할때
중국의 동주시대 내사(內史)벼슬을 지낸 숙복(叔服)을 시조로 삼는다
동주의 숙복은 인체의 뼈를 보고 골상학을 연구해 길흉을 판단 하였고 춘추좌전에 보면 숙복이
공손교의 두아들의 상을 봤는데 그의 예언이 뒷날이 그대로 맞추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숙복 이후에는 소고포자(故布子) 라는 사람이 인물이 이어받아 공자의 상을 본바 장래에 위대한 성인이
될것을 예언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후 전국시대 위나라 살았던 당거라는 사람이 그를 다라 계승해
골상을 중시하는 이전의 관상학에 기색을 포함하여 학문적으로 관상학이 완성딘걸로 봅니다
한나라의 고조황제 유방은 관상학에 심취해 그 학문을 우선적으로 신임하여 유방의 장인이 여공인데
유방이 천자가 되기 이전인데 유방을 보고 장차 황제가 될것을 예언하고 자기의 달과 혼인을 시켰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여공은 큰뜻을 품고 군인으로 입신하여 나중에 황우를 물리치고 황제가되어
한나라 세운뒤에 관상가들에거 나중에 특별한 대우를 해주었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여공은 유방의 상을 보고 왕이 될것을 예언 하였고 또한 삼국시대의 관로가 관상가 이름을
크게 날렸다 이로 인해 관상학은 이로 인해 관상학은 더 발달하였고 관상가 허부는 한신을보고
상을 봐준뒤 궁중에서 세력을 잡아 부와 권세를 누렸다는허부의 인륜식감이 있다 이후 관상가
겸도라는 사람이 계승하여 동방삭 외에도 많은 관상가를 배출하였고 이에 따라 한나라때에는관상학이
크게 발전하여 수많은 관상가들이 이름을 남기었으며 이후 진나라 천하를 통일하고 진시황의 분서갱유
라는 귀한 책들이 없어지는 일이 일어 났지만 이러한 관상법은 도제관계를 통해 극비밀리에 전해졌다
덕분이 관상학이 사라지지않고 명맥을 유지 해 온것으로 알려 져 있다
관상학은 이후 남북조시대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와서 여러전서를 통해 정립 되었다고 전해져
달마상법으로 주 내용으로 불교를 전파시키고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후 현대 과학의 비조가 되고 잇는 마의 선인은 화산의 석실에서 살면서 겨울에도 삼베옷을 입고있어
마의 선생으로 불렀고 그의 제자 진박이 마의 선생의 상학비전을 책으로 지어 "마의 상법"이라 했다
집박의 호는 희이인데 송나라 태종이 그를 불러 그의 관상학에 극찬을 아끼지않고 벼슬을 주었으나
다시 화산 석실로 들어가 신상전편을 출판 하였다
이와같이 마의 상법과 달마상법은 오늘날 상학의 2대 상전을 이루며 그밖에 수경집 신상전편
풍감원리 면상비급 등이 상서로서 오늘날에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관상학이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수입된것은 7세기초 신라의 선덕여왕 때이며 당시 승려들이
달마상법을 배워 고관 대작들의 상을보고 미래의 일을 점친 애기가 많은 고서로 통해 전해졌다
조선 태조대왕의 왕사로 있던 무학대사는이성계가 아직 임금이 되기전에 그의 상을 보고
장래의 황제가 될것임을 예언 하였고 한양의 도읍터로 잡아 주었다
또한 명종때 남사고는 선조가 왕위에 오를것과 임진왜란이 닥칠것을 예언 한바 있다는 기록된 고서가
있는데 고서를 보면 역대 고관대작 집에는 관상가들이 출입이 많았고 예언이 적중하여 관상이 발전
하게 된것으로 본다 특히 조선 시대 초기에는 이런 예언 해준사람이 많아 관상이란 영화도 이때 일이다
이런한 관상은 대개 중국에서 체계화되고 발전되어 온 만큼 우리 나라 사람의 얼굴에 그대로 적용이
되어 그대로 내려 올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나라만 변용된 관상학을 정립하게 되면서 독자적으로
발달한 관상법으로 각 얼굴 부위의치수를 재어 길흉화복을 만들수 있는관상법을 만들었고 이와 관련해
조선시대 세조때 영통사의 도승이 한명희 상을 자로재어 재상이 되걸을 예측한 니야기가 전해진다
동양분만 아니라 서양에서 도 관상학의 유래가 깊다
서양관상학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에서 관상학이 발달 하였는데 이는 예언적 목적이 아닌 인간을
분석하는 그 목적으로 주로 철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어 왔다
포틀레 마이오스에 의해 점성술과 천문학의 형태로 인식되어 과학으로 입지를 굳히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관상학에 커게 기여 햇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과 육체가 하나이며 영혼의
아름다움이 외양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하엿다 즉 내면의 변화를 통하여 관상이 변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젊은이들에게 내적 성숙을 확인하기 위하여 아침마다 거울을 보라고 지시하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을 동물에 비유하여 관상학이란 책을 출판하여 몸은 영혼을 드러내는 표지라는
믿음을 근거로 서양에서도 관상학의 뿌리가 깊다 저서로 동물지 수면중예언 관상학등이 있다
이후 그리스 로마시대에는 생김새를 유형별로 나누고 인간의 성격을 나누어 분석한 관상법이 등장하고
이때부터 관상은 종교나 샤머니즘을 벗어나독자적인 관상학에 자리 잡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은 타고나 신체가 성격을 말해주지만 이러한 성격을 관상학으로 극복할수 있다고주장
하였고 본격적으로 사람과 닮은 동물의 특징을 비교하여 관상으로 해석했다
이마가 좁은것은 돼지에게 보듯 멍청함을 나타내고 사각으로 균형잡힌 이마는 사자처럼 용맹하다는
식으로 물형관상과 같은 관상법의 체계를 만들었다 이후 분석적 관상에서 예언적 관상학으로 다시 힘을
얻게 된느데 로마 시대때 정치와 관상이 결합하여 신의 뜻을 계시하는 점성학이 관상에 영향을주어
로마시대대의 대표적 관상학자인 폴레몬과 아리스텔레스의 관상학을 실생활과 연결해 길흉을 살피었고
이떼 관상에서 눈이 가장 중요하다는 개념이 시작 되었다
그런데 이시기에는 황제의 관상을 신격화하여 대중에게 알리기위해 서기 122년에 출간된 "황제전"에서
로마의 3대황제 가이우스 카이사를 폭군으로 호감이 주지않는 외모로 묘사하엿고 반면 귀족사회에
거의 알려지지않은 인물 옥타비아누스를 균형잡힌 몸매를 갖고있다고서술하여 황제의 모습을
이상적인 관상에 일치시켜 대중들에게 늘리 알렸으며 훗날 로마의 장악하고 제정 로마시대를 여는초대 황제가되어 세상에서 가장 존엄한 자를 뜻하는 아우구스투스로 불려지게 되었다
이후 중세에서는 여러분야의 관상학이 결합하게 되었으며 의학 분야 에서는 체질과 결합하여
건강과 질병을 나누었고 히포크라테스는 생김새와 인종의 차이는 각지역의 풍토와 기후의 영향을
받으며 그영향으로 체질과 관상이 달라지고 피부색과 목소리 기질등으로 나누어진다고 해석했다
그렇기 때문에 해가뜨는 지역의 사람들은 신체와 정신이 건강하며 그 이유는 태양의 기운과 달의 기운
그들이 적당하기 때문에 얼굴색이 다른 지역의 사람보다 더 밝으며 피부색 붉고 목소리가 곱고 기질이
뛰어 나다고 해석 하였다 그때의 상황에서 그런 해석 되는 것이다
그러나 중세의 성서에는 관상학과 관련 있는 부분은 하느님이 창조 한것으로 간주하여 신학을 재해석
해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인간은 신의 모습을 본뜬 존재라고 믿으며 사람과 동물을 비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상학을 비난하여 힘을 잃게되며 동물에 비유하는 관상학을 금지 시키게 되었다
하지만 관살학은 점성술과 체질의학으로 더욱 발전 하였으며 관상은 여러 계층에서 친숙한 학문으로
자리잡기 시작 하였으며 그리스의 의학자 갈레노스의 체술은 19세기 까지도 명맥을 유지하며
네델란드의 인물학자인 에라스므스의 체상에 관상학을 더 하여 연구 하였다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면서 인간의 몸에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타고난 운명보다 관상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란인식이 생겨나며 신준상승의 활발해진 사회 분위기와 일치 하였고 이시기에는 옷 밖으로
드러난 얼굴과 손에 관상의 중요한 대상으로 자리 자았으며 이때 손금을 보는 수상학이 발전하여
가장 인기잇는 관상학으로 발전 하였다
이후 18세기에는 과학 혁명의 영향으로 관상이 서양 역사의 뒷전으로 물러나는 시기가 찾아온다
이시기에는 외모를 가꾸고 치장하는 화장 가방 가면 옷등으로 몸을 가리는 시대이기 때문에 타고난
관상을 풀이하는 관상학은 인기가 없어졌으나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본질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떠오르며 스위스의 신학자이자 의사인 라바트의저서 "관상학" 베스트셀러에 오르면서 스위스 프랑스
독일 영국에서도 출판되어 관상의 저넝시대가 다시 되었고 라바타는 생리학 해부학 동물학등 새로운
과학을 총결합하여 관상학을 집대성 하였다
라바타이후 19세기에서 관상학과 결합한 골상학을 출판 하였다가 쇠퇴하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19세기 이후 두개골의 모양을 관찰하는 골상학으로 다시 부활하게 되는데 두뇌 각부위의 발달 정도
두개골의 발달이 상응 한다는 믿음에따라 정립 되었으며 소설가 에드가 엘렌포는 골상학을
"과학의황제" 라고 칭하기 하였으며 20세기 들어가서 골상학은 죽은 과학으로 취급 되었지만 범죄학
수사학등 여러 학문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렇듯 과학의 합리주의로 뭉쳐 잇는것처럼 보이는 서양도
관상을 통해 타인에 대한 이해와 호기심을 충족 시키기위해 실생활과 문화처럼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으며 과학과 미신의 시대에 따라 그기준이 달라지는것을 이해하고 넘어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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