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인문학이 모든 학문의 중심이라는 말에 대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되면서 우리의 삶은 점점 편리해져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IT와 같은 기술의 발달으로 세상이 바뀌기 시작하면서 관련 학과나 직업이 늘어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과학 기술이 발달할 때마다 들리는 말이 문과는 사라지지 않는다, 과학이 발달할 수록 철학과 같은 인문학이 더욱 중요해지게 된다 등인데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로봇과 같은 인공지능이 우리의 사유를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인가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질문자님이 이미 답을 알고 계신 듯 하네요^^
4차산업혁명은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만들지만,
"편리하다"는 의미 속에는 인간과 인간이 대면할 일이 없어진다는 의미도 있죠.
1973년 출판된 미하엘 엔데(Michael Ende)의 판타지동화소설, "모모"에 이미 회색인간이 등장하죠.
회색인간이 마을 사람들의 시간을 '돈'으로 계산하면서, 돈이 되지 않는 모든 시간을 저축하라고 가져갑니다.
언젠가는 행복할 그 시점을 위해 시간을 저축하라고 하죠.
(영화 모모의 한 장면)
제2부 회색 신사들, 제11장 악당들의 모략
모모의 출현은 회색 신사들의 연사들의 목소리로 작가의 세계대전 이후, 인간사회를 보는 시각을 잘 보여줍니다.
"'모모'와 같은 소녀는 이전에는 존재한 적이 없다."
"우리가 직접 모모를 만날 필요가 없어요. 모든 인간이 모모를 대적하게 만들면 됩니다"
4차산업혁명이 인간의 편리한 삶을 제공하지만, 그 편리함을 내려놓는 방향으로 결정할 사람은 단 한 명만 있다는 거죠.
로봇이나 AI, 인공지능, 빅데이터는 이미 인간이 지금까지 기록해 놓은 데이터를 근거로 인간의 사유를 흉내냅니다.
빅데이터를 조작하는 로직은 인간이 선택합니다.
'편리함', '경제적', '발전적', '성공적'이라는 로직으로 빅데이터를 추출한다면,
그 이면에는 '비인간적', '착취하는', '자연 파괴적', '소득 불평등'이라는 로직을 넣은 것과 동일한 결과가 추출될 것입니다.
철학과 인문학을 로직으로 사용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으려고 추출된 데이터를 본 후, 다시 로직을 조작할 것이 뻔하지 않습니까?
2차대전은 과학의 발달(원자폭탄?)이 인류의 공멸을 향한다는 것을 경험했기때문에,
인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사유를 이론화한 것 아니겠습니까?
당연히 전쟁으로 부를 챙겨왔던 사람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을 '하위문화'로 이름 붙이고, 부정적 이미지를 부각시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전쟁이나 금융업 또는 큰 정부 역할을 옹호하죠.
그런데 인간은 철학과 인문학을 통해 '모모'의 친구들로 변해갑니다.
과학이 너무 발달해 버려서 SNS, 개인 영상매체, NFT, 메타버스가 하위문화를 주류문화보다 더 보편화시키고 있습니다.
철학이 없이 인류의 미래를 AI에게 맡기면, 이렇게 말할 것이 뻔합니다.
인류의 지난 역사의 기록 데이터를 모두 분석한 후에, AI는
"인류만 없어진다면 지구의 다른 모든 생물은 안전하고 풍요롭겠다"
많은 철학자들의 사상과 인문학적 작품들, 예술품들은 모두 모모가 각자의 가슴에 되돌려 준 '시간의 꽃'과 같은 존재일 겁니다.
그래서 4차산업혁명은 철학과 인문학 위에 존재해야하는 것이고요.
철학과 인문학의 가치는 돈을 사고 파는 가치가 아니라, 인류와 지구와 우주의 생존인거죠 ^^
*제가 인문·예술전문가로 승인되고 처음 쓰는 글이라 너무 장황하게 썼네요.
답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새 해 복 많이 받으시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마음껏 사랑하시는 한 해 되세요.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글쎄요, 크게 두가지 뜻이 있지 않나 싶네요 첫째 인문학이 필요없어지게 된걸 대놓고 말하기 무엇하니 관을 씌워주려고 괜히 하는 말이거나 아니면 잘 모르면서 자기가 인문학을 배윘으니 소중하다고 우기려는 심리에서 나온 말일 가능성.
둘째 인문사회역사철학 등 진퉁 깊은 수준에 도달하몃 도리어 번득이는 직관과 통찰을 갖게 되는데 이런 과학기술시대에 진정 값진 통찰력은 인문을 등한시하면 불가능하니까 한 이야기일 가능성.
정리하면 인문학만해서는 인문학꼴통이 될뿐이니 과학기술, 경제금융 등 다양한 교양 속에서 인문학을 관통해야 인문학도 소용있을 겝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덕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과학기술의 발달의 근원을 생각해보면 결국은 과학기술도 철학적 사유에서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과학기술의 발달은 인간 소외현상을 필수적으로 동반하기 때문에 인간 존재의 문제점에 봉착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따라서 철학과 인문학의 부활 없이는 인간의 삶을 지금보다 더 발전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철학은 어렵고 고리타분한 학문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왜 살아야 하는 가의 물음에 답을 줄 수 있습니다. 이를 뒷받침 하는 것이 인문학이기도 하기에 철학과 인문학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를 노르웨이의 험한 지형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동자들의 안전을 위해 발명한 것은 그의 '철학(가치관)'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살상무기로 바뀐 것도 지도자들의 '철학'이었을 것이며, 이에 반성하고 '노벨상'을 제정해 인류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도 '철학'이었을 것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철학이나 사상 등의 인문학의 종언이 불가능한 이유를 선의지(good will)라는 개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칸트는 이러한 선의지를 도덕적 관념으로 악의 반대 개념으로 해야만 하는 당위성으로 명명합니다.
그런데 가다머가 말하는 선의지는 칸트의 개념처럼 요청되고, 결정된 게 아닌, 완벽한 판단이나 기획 등을 위해 끊임 없는 대화, 이에 따른 '보다 나음'으로 진행하도록 재촉하고 반박합니다. 이를 가다머는 칸트와 유사하게 호의, 선의지라고 일컬었습니다.
이러한 칸트의 사고방식은 로봇 인공지능이 대신할 수 없는, 도덕적 판단을 낳았고, 가다머로 부터는 상황 윤리적 판단이 도출됐던 것입니다.
이처럼 과학적 문명의 저변에도, 추측컨대 과학기술의 향방이나 이정표의 판단에 대해선 어쩔 수 없이 도덕과 윤리적 판단의 기조를 배제하거나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육아·아동전문가입니다.
기술공학적인 것이 선호되는 시기임에도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나온지 20년이 되었어도 결국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니까요. 사람이 근본이고 사람과 세상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인문학이고 그 중에 철학이 있지요.
과학자가 세상을 바꾸기도 하지만 때론 공상과학 소설이 혹은 인문학적 상상력과 호기심이 더 큰 변화의 시초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융복합이 강조되는 시대고 공학적 능력을 갖춘 인재가 인문적 소양까지 갖추면 가치가 폭등하는 시대가 되었지요.
아무쪼록 제 답변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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