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릉비가 왜 임나일본부설의 근거 인가요?
일본극우사학계의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주장이 있는데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광개토대왕릉비가 있다는데 내용이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본은 <일본서기>의 신공황후 기사가 '광개토대왕릉비'에 임나일본부설을 증명하는 결정적 기록이 나온다고 주장합니다. 바로 유명한 신묘년 기사입니다.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왜가 신묘년(391년)에 바다를 건너 와서 백제, 임나, 신라를 쳐부수고 신민으로 삼았다.)그런데, 일본의 해석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즉 신묘년 기사의 '도해파(渡海破)'의 주어는 '왜'가 아니라 고구려로 봐야 한다면서, "왜가 신묘년에 왔으므로,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 왜를 깨뜨리고 백제와 □□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야 한다는 것입니다.(정인보)
게다가 1972년에는 재일동포 사학자인 이진희가 일명 '석회 도포설'을 주장입니다. 즉 처음 비문을 연구하는 과정에 일본 육군 참모본부가 깊숙이 개입했었다는 점을 근거로 참모본부가 '탁본'을 바꿔치기 하고 심지어 광개토왕 비문에 석회를 발라 글자를 변조하기까지 했다고 주장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왜인들이 신묘년(391년)쯤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x라(아마도 신라) 를
xx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완전 박살나서 해석 불가능한 한자3개 때문에
왜인들이 신라와 백제를 신민 삼은 걸 수도 있고
왜인들이 공격하는걸 둘중 하나를 공격해서 다른 쪽이 재점령 한 것일 수도 있고
고구려가 두 나라를 도와줘서 신민 삼은 걸 수도 있어서
(고구려 왕릉비에 적힐 내용이면 이쪽이 더 적절하겠죠)
다양한 의견이 존재합니다
설령 일본 주장 대로 왜인들이 백제와 신라를 점령한 것이더라도
애초에 얼마나 큰 땅을 점령한건지는 나와 있지 않아서 그냥 마을 한두개였을 수도 있구요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개토대왕비의 비문의 글자가 정확치 않아 나타난 현상입니다. "신묘년조 왜이신묘년래도해파백잔⬜⬜신라이위신민" 이며 주요 논점은 도해파의 주체를 누구로 볼 것인가의 문제와 자구가 일부 변조되었는지의 여부입니다. 초기 연구를 주도했던 일본 학계에서는 도해파의 주체를 왜로 보고 임나일보부설의 주요근거로 삼아왔습니다. 그러나 정인보 박시형 등 남북 사학자들은 도해파의 주체를 광개토대왕으로 보고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신모년도 당시에는 왜구가 백제나 신라를 공격할 만한 세력이 아닌 해적들이었기에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