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숙주는 왜 변절자가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조선시대 세종대왕때 업적을 남긴 신숙주는 단종 정권에서 수양대군으로 가는 배신자가 되었는데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숙주(申叔舟, 1417~1475)는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화려한 경력과 중요한 업적을 이룬 조선 전기의 대표적 명신이다. 그러나 ‘숙주 나물’이라는 표현이 상징하듯이, 그는 절개를 저버리고 영달을 선택한 변절자의 한 표상으로 지목되어 상대적으로 폄하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모든 사람이 가장 관심을 갖는 일의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두고 내리는 이런저런 평가일 것이다. 작은 사실, 그것도 정확치 않은 풍문에 기대어 발설되고 어느새 널리 퍼져있는 비방을 들을 때, 그 당사자는 절망하거나 분노하게 마련이다. 이런 현상은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에게 영원히 남아있을 운명일 것이다. 거의 모든 인간사에 적용되는 말이겠지만, 그래서 정확한 사실에 입각한 신중한 판단과 섬세한 표현은 어떤 사람에 관련된 평가에 특히 중요하다. 짧은 내용이지만, 이런 종류의 글을 쓰면서 그런 민감성을 자주 생각했다.
세조는 이런 그를 당 태종의 명신인 위징(魏徵)에 견주었고, 실록의 졸기(卒記)에서도 “신숙주는 인품이 고매하고 너그러우면서도 활달했다. 경사(經史)를 두루 알아 의논할 때 항상 대체를 파악했고, 대의를 결단할 때는 강물을 터놓은 듯 막힘이 없었다”고 격찬했다(성종 6년 6월 21일).
신숙주와 관련해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단종을 저버리고 세조를 선택한 결정일 것이다. 세조의 정난은 도덕적 명분이 희박한 정치적 야심의 소산이 분명했다. 복잡한 이해 관계가 상충하는 현실과 정연한 논리가 지배하는 이상은 거의 언제나 대립한다. 인간의 선택은 그러므로 대부분 그 사이에서 이뤄진다.
계유정난이 일어났을 때 외직에 나가 있었다는 사실은 신숙주가 그 모의에서 비교적 떨어져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의 재능이 그런 무력적 거사에는 적합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가장 주도적으로 모의하고 성공시킨 사람은 다 알 듯이 한명회였다.
신숙주에게 세조의 집권은 자신의 의지와는 비교적 멀리 떨어졌던, 그러니까 움직일 수 없는 현실로 주어진 운명에 가까웠다. 그것을 거스르는 것은 공식적 삶의 포기와 같은 의미였다. 탁월한 재능을 가진 30대 후반의 인재에게 그런 선택은 참으로 어렵고, 어쩌면 무의미한 결정이기도 했을 것이다. 앞서 간단히 살펴본 그의 경력은 아부나 언변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탁월한 학식과 실무적 능력과 국제적 감각이 조화되어야만 가능한 업적일 것이다. 그의 선택은 일차적으로는 그의 삶에,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조선의 발전에도 도움이 된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국립국어원, [신숙주의 학문과 인간], 2002; 박덕규, [신숙주 평전- 사람의 길, 큰사람의 길], 둥지, 1995;손승철, [해동제국기의 세계], 경인문화사, 2008.
[네이버 지식백과] 신숙주 [申叔舟] - 국제적 안목과 실무적 능력을 겸비한 조선 전기의 명신 (인물한국사, 김범, 장선환)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숙주는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연구를 할 때 그를 도와 한글 창제의 공신이 됩니다. .세종 대왕이 명나라에서 음운학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누구를 보낼까 고민하던 세종에서 당당히 나선 사람이 바로 신숙주입니다. 신숙주는 중국어, 일본어, 여진어, 위구르어, 류쿠어(현재의 오키나와) 등 다양한 언어에 능통했다고 알려졌습니다. 외국어의 실력이 워낙 출중해 사람들은 신숙주를 걸어 다니는 인간 번역기라고 불렸고 신숙주의 언어적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능력은 이후 성삼문과 함께 집현전에서 한글 창제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런 그가 세종의 아들 수양 대군을 따라 변절을 했다고 욕을 할 수가 있을 지 사실 망설여 집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