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반정이 일어나는 이유와 과정이 어떻게 되나요
중종반정이 일어나는 과정이 긍금합니다. 처음 시작부터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가담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네요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중종반정(中宗反正)은 1506년(연산군 12년) 음력 9월 2일(양력 9월 18일) 막장의 극을 달리던 연산군을 몰아내고,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을 옹립한 사건이다. 선대의 1차 왕자의 난, 계유정난, 후대의 인조반정과 달리 새로 집권한 왕이 직접 반정에 가담하지 않았다.
유순정, 성희안, 박원종, 유자광, 유순과 연산군에게 불만을 품은 인물들이 연합해 일어난 반정이다.종종반정의 의의와 영향은 다음과 같습니다.
중종반정은 조선 왕조 최초로 순전히 신하가 주도하여 왕을 몰아낸 반정 사건이다. 이전의 태종, 세조, 훗날의 인조도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왕족이 반정을 주도했다. 반면 중종은 가만히 있다가 신하들에 의해서 옹립되었다. 중종은 선왕의 적자이다.
연려실기술에서 중종반정을 기록한 부분을 보면 반정이 일어난 날에야 비로소 반정군에 참여하여 살아남은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다. 당시 연산군 본인과 극소수의 최측근을 제외한 조정의 신하들 사이에 '이 자식 안 되겠어 빨리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분위기가 퍼져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연산군과 극소수의 최측근만 제거당하고 대부분의 부패한 인물들이 그대로 남게 되었다는 문제도 있었다. 그래도 의외로 이들은 권신치곤 빨리 사라졌다. 유자광의 경우 무오사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과거 때문에 중종 2년에 축출되어 귀양지에서 71세로 사망하였다. 유자광의 아들 두 명은 중종의 배려로 유자광의 사후 공신의 지위를 회복하였고 예를 갖추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이후 중종반정을 이끈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 3대신이 중종 5년, 7년, 8년에 줄줄이 죽으면서 중종은 조광조를 비롯해 사림에 힘을 실어줄 수 있었다.
중종반정이 일어났어도 백성의 삶에 큰 변화가 없었다. 금표를 철폐했는데 연산군이 금표로 빼앗은 땅의 대부분 주인은 대신이나 대간들이었다. 연산군이 유흥 비용 마련을 위해 내수사를 과세 기관으로 초법적, 비공식적으로 운영하던 것을 중종 시기에 공식 기관으로 인정하였다. 불교 탄압도 그대로 이어졌다.이건 뭐 개국 초부터 하던거고...
연산군 시기에 백성에게 가장 큰 부담이 되었던 것은 공물이었다. 본래 토지세인 전세와 개인 현물세인 공물, 노동력 제공인 역으로 이루어져 있는 세금체계에서 가장 비중이 높았던 것은 전세였다. 그런데 연산군 시기 사치스런 생활을 위해 공물의 양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백성의 부담이 크게 늘었다. 무엇보다 공물은 재산의 다과라 할 수 있는 토지와 관계없이 개인당 부과되는 인두세 같은 개념이었기 때문에 빈한한 계층일수록 공물에 부담이 컸다.
공물 문제를 해결해야 했지만 중종반정 이후로도 이러한 공물 과다 수취는 개선되지 않았다. 늘어난 재정에 따라 이미 사용처가 만들어진 상황에서 다시 없애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이를 바꾸기 위해서는 공물 대신 전세의 비중을 높여야 했고, 조광조가 대공수미법을 주장했지만 기묘사화로 실권하면서 현실화되지 못했다
공물 과다 수취는 세조 때 보법을 실시하여 군역부담 증가로 붕괴하고 있던 양인층에 결정타를 먹였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서 양인의 몰락이 가속화되었고, 임진왜란 이후 공물 수취의 모순이 대동법을 통해서 해결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중종도 초반에 노회한 반정공신들에게 밀려서 제 목소리를 못 냈다. 즉위했을 때 중종은 열아홉 살이었다. 반정에 참여했던 채수는 자신의 소설 설공찬전에서 공신들을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중종반정을 주전충에 빗대어 비난하는 바람에 중종을 모욕했다 하여 큰 논란이 되었다. 공신 문제는 이후 조광조의 위훈 삭제 시도와 기묘사화로도 이어진다.
반정 도중에 연산군의 처남이자 중종의 장인이었던 신수근이 살해된 것과 단경왕후의 폐위도 중종반정의 의의를 깎아먹었다. 중종의 조강지처를 반정공신들이 강제로 내쫓았기 때문. 그래서 반정공신들 3인방은 배향공신에서 파내자는 상소가 순조때까지 올라왔다. 심지어 이 3인방도 폭군을 몰아낸 충신(?)치고 대부분 행적이 나빠서 성희안만 빼면 욕을 먹고 그나마 성희안만 안 먹지만 그도 자기 친인척을 공신에 슬쩍 끼워넣은 일이 있다.
그리고 일본 센고쿠 시대의 오우치 가문와 몇몇 다이묘 가문들에게는 조선에서 무역을 통제하기 시작하며 이익이 줄어들게 된다. 이에 오우치 요시오키는 자신이 백제 왕의 후손임을 내세워 특혜를 받으려 했으나 실패한다.
삼포왜란, 닝보의 난으로 계기로 센고쿠의 오우치 가문이 몰락하게되는 시발점이 된다.
군약신강의 시대가 중종반정 이후부터 지속되었다.출처: 나무위키 종종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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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반정은 연산군의 폭정이 원인이 되어 발생하였다. 익히 알려져 있듯 성종[조선](成宗)의 맏아들이자 중종의 이복형인 연산군은 어머니인 폐비(廢妃) 윤씨와 관련된 개인사, 그리고 무오사화(戊午士禍), 갑자사화(甲子士禍) 등의 폭정으로 인해 당대에 많은 원망을 사고 있던 임금이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종직과 그의 문인인 김굉필·정여창의 교육활동에 의해 영남·기호지역 사림들의 인간적·학문적 접촉이 이루어지면서 성종 이후 훈구세력에 대응되는 정치세력, 즉 사림파로서 모습을 갖추어 갔습니다. 사림파의 중앙정계 진출은 훈구세력과의 갈등과 충돌을 예고하였습니다. 성종대 중반 이후 훈구세력 기용의 부당성과 소릉복위 주장 등 과감한 언론을 행사한 이들은 연산군의 즉위 이후 그 세력의 한계가 노출되면서 훈구파로부터 탄압을 받는 사건, 즉 무오사화가 발생하였습니다. 무오사화는 세조의 집권을 부정하고, 이에 반대한 인물들을 지적한 김일손의 사초가 빌미가 되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세조대 이래 정치·사회·경제적 여러 특권을 향유하고 비리를 저질러오던 훈구파를 사림파가 견제하려 한 데서 발생하였습니다. 이로써 성종대 이래 중앙정계에 진출했던 사림파는 일대 타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연산군의 생모인 윤비가 폐위·사사된 사실로 발단이 된 갑자사화는 궁중과 결탁한 조신과 부중의 조신간의 대립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무오사화에서 잔존한 사림파도 화를 입었습니다.
이후 전개된 연산군의 난정은 중종반정으로 종식되었습니다. 반정을 통해 집권한 공신집단은 이후 정조의 고위직을 장악하여 정국을 그들 중심으로 운영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중종 9년 조광조가 정계에 진출한 이후 사림파는 중앙정계에 재진출하여 급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훈구대신 집권하에 빚어진 각종 정치적·사회적 비리를 척결하고 ‘지치’를 실현하기 위한 과감한 개혁을 주창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곧 훈구파는 물론 온건파 대신·국왕의 완강한 저항을 야기하였고, 그 결과 위훈삭제 사건을 계기로 사림파가 크게 희생되는 기묘사화가 발생하였습니다.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 유자광 등 1백여 명이 정국공신이 되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경제&금융 분야, 재무설계 분야, 인문&예술(한국사) 분야 전문가, 지식iN '절대신 등급' 테스티아입니다.
✅️ 연산군이 폭정을 일삼고, 신하들의 가산을 적몰하자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을 중심으로 연산군을 몰아내고 진성대군 역(후의 중종)을 즉위시킨 사건으로, 이 과정에서 동참하지 않은 좌의정 신수근은 반정 세력에 의해 죽게 됩니다. 연산군 폐위 후 중종이 즉위하게 되는데, 이때 중종의 비가 신수근의 딸이었기 때문에 이 부인 역시 폐출이 되는데 이가 '단경왕후 신씨' 입니다.
- - - 추가적으로 궁금하신 점은 의견으로 남겨주시면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성의껏 답변을 드려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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