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권율은 임진왜란 초에 광주목사로 있으면서 군사를 일으켜 전공을 세우며 전라도 순찰사가 되었는데, 그 뒤 중국 명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서울을 수복하려고 군사를 이끌고 수원성에 머물다가, 1593년 2월 1만여 병력을 행주산성에 집결시켰습니다. 권율은 조방장 조경을 시켜 행주산성을 수축하게 하고 목책을 만들게 하였으며, 병사 선거이는 금주, 창의사 김천일은 강화, 충청감사 허욱은 통진에서 각각 그를 지원하기로 하였다.왜군과 맞서 치열한 싸움을 계속하였으며, 심지어 부녀자들까지 동원되어 관민이 일치단결하여 싸웠습니다. 이 때 부녀자들이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날라서 석전으로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으며 여기에서 ‘행주치마’라는 명칭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있듯이 당시 행주산성의 싸움은 치열하였다고합니다. 마침내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는데, 권율은 이를 추격하여 130여 명의 목을 베었으며 적장 우키타 히데이에, 이시다 미쓰나리, 깃카와 히로이에 등에게도 부상을 입혔으며 행주산성의 전투는 임진왜란의 3대첩 중의 하나로서 권율 장군은 이 공로로 도원수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