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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큼성큼걷는펭귄836
성큼성큼걷는펭귄83623.01.12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동물이 가장 먼저 가축화되었나요?

과거 농경사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

군사력과 직결되는 말

이른 아침을 알려주고 식재료가 되어준 닭

영원한 인간의 친구 개

등등 과거부터 여러가지 동물과 함께 생활하였는데 어떤동물이 가장 먼저 가축화가 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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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김보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는 농경사회 중심으로부터 시작이 되어서

    농사에게 필요한 소를 먼저 귀하게 여기면서

    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거의 전재산이라고 생각할만큼 귀하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개는 모든 동물 가운데 가장 일찍 가축화가 이뤄졌다고 하네여. 그러나 언제 어디서 어떻게 늑대가 가축이 됐는지는 오랜 논란거리라고 합니다. 개의 골격이 발견된 가장 오랜 구석기 유적은 1만 4200년 전의 것인데여. 유전자 분석 연구에서는 개의 가축화 시기를 2만7000∼4만년 전으로 추정한다고 하지요. 거기에 이어서 돼지, 닭 등의 순서로 가축화가 이루어 진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야생동물이 인간에 의해서 순화되어 가축화된 것은 선사시대부터인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신석기시대에 이르러서는 오늘날에 볼 수 있는 대부분의 가축들이 가축화된 것으로 되어 있다.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최초의 가축은 개로서 약 1만 2천년 전에 이미 사육되었고, 소·말·돼지·면양·염소 등은 1만여 년 전에 가축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나라의 재래종 소인 한우는 유럽원우와 인도원우의 혼혈에서 출발하여 1800∼2000년 전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다른 소의 품종과 교잡 없이 단일종으로 번식하여 사육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말은 고대의 부여·고구려 때부터 사육되어왔고, 돼지는 2000여 년 전 북방으로부터 유입되어 우리 민족의 원시조상인 읍루족에 의해서 사육되기 시작하였다.

    면양은 기원전 150여 년경에 부여에서 사육하였으며, 산양은 우리나라에서는 염소라고도 하는데, 1000년경 고려시대에 중국에서 처음 들여왔다는 설이 있다. 부여에서는 군사(軍事)가 있을 경우 소를 잡아서 그 발톱의 상태로 길흉을 점치는 풍습이 있었는데, 소의 발톱이 벌어진 경우는 흉조로 합쳐진 경우는 길조로 삼았다고 하며, 고구려에서는 제천행사 때 돼지를 잡아 제를 지냈다고 한다.

    또 변한에서는 소와 말을 혼례식에 이용하였으며 마한에서는 순장에 이용하였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가축들은 사육 초기에는 주로 희생·순장·점술에 이용되었으며, 식용은 부차적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조에 부여족은 짐승을 기르는 데 능숙하고, 관직명으로 마가(馬加)·우가(牛加)·저가(猪加)·구가(狗加) 등 가축의 이름이 붙어 있다는 내용이나, 『위서』 고구려조에 유화가 알을 하나 낳았는데 부여왕이 이 알을 개에게 주었더니 먹지 않았고 돼지나 말·소에게 주어도 피하였다는 주몽의 탄생설화, 백마·백계(白鷄)와 관계있는 박혁거세·김알지의 탄생설화, 읍루족에게는 소·말이 있고 돼지를 즐겨 기른다는 기록, 제주도에서도 소와 돼지를 기르고 마한에서는 세미계(細尾鷄)가 난다는 기록 등은 우리나라 고대의 가축사육을 추측할 수 있는 사료들이다.

    고려시대에는 초기부터 목축을 권장하여 내륙·섬 등에 소나 말을 사육하기 위한 국립목장이 운영되었고, 공사(公私)의 제(祭)에 암컷을 쓰는 것을 금하였으며, 마정을 다스리는 사복시(司僕寺), 잡축(雜畜)을 기르는 전구서(典廐署), 제사용 희생을 맡는 장생서(掌牲署) 등의 직제가 있었다.

    『고려사』 병지(兵志)에 의하면 가축의 사육료식(飼育料式)도 있었는데, 이것은 일 년을 두 시기로 나누어 5월부터 9월까지를 청초절(靑草節), 10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를 황초절이라고 하며 가축 한 마리에 대한 매일의 피·콩·소금 등의 공급량을 규정한 것이다. 고려시대의 가축은 주로 전쟁과 운반·농경에 쓰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가축은 주로 역용으로 사육되었으며, 유교의 사농공상 계급관념은 실학이나 실업을 천시하여 가축의 사육과 이용이 장려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까지도 가축사육은 농사를 짓기 위한 노동력의 확보, 군마의 육성, 그 부산물로 얻어지는 두엄 등을 이용하는 데 불과하다가 민족항일기에 이르러, 식민정책의 영향으로 외국가축의 도입, 관영목장의 경영, 일본인들에 의한 유우·면양·종마 등이 산업적으로 사육되기 시작하였다.

    1945년 광복을 전후한 사회혼란기에는 일본인 소유였던 젖소·종축을 비롯한 많은 가축이 도살되어 그 당시의 가축 수는 광복 전에 비하여 반으로 줄어들었다. 미군의 군정실시 후 어느 정도 사회질서가 회복되면서 가축장려정책이 수립되었으나, 6·25전쟁으로 가축의 수는 급격히 감소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1953년에 제1차 축산부흥5개년계획을 수립하여 1957년에는 남한에서 사육된 가축의 수가 광복 전의 남북한 전체 가축 수보다 많게 되었다. 1958년 제2차 축산부흥5개년계획으로 부업형태의 가축사육이 유축농업적(有畜農業的)인 형태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 뒤 주로 미국으로부터 각종의 가축품종들이 도입되었는데, 특히 가금류와 중소가축의 도입이 활발하였다.

    1960년대에는 경제력과 생활수준이 향상되어 축산물의 수요가 점차 늘어남으로써 사회적·국가적 차원에서 축산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어, 1962년부터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기간에는 낙농·양계 부문에서 상업적인 축산이 시작되게 되었다.

    그 뒤에도 한우육성과 비육, 낙농사업 등의 축산진흥정책이 계속적으로 수립되어 농가경제를 향상시킬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며, 오늘날에는 기업적·전업적인 수준에서 가축을 사육하는 곳이 늘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