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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발한메추라기알192
활발한메추라기알19223.02.28

청나라 서태후는 왜 악녀었나요?

중국의 역사는 다른 나라보다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로 중국의 3대악녀는 여후, 측천무후, 서태후입니다. 그렇다면 청나라 서태후는 왜 악녀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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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2.28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서태후는 그 누구보다 권력욕에 눈이 먼 여인이었습니다.

    권력을 차지하고 지키기 위해서는 악녀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래 귀인의 직첩을 받은 후궁이었으나, 함풍제의 장남인 동치제를 낳으면서 귀비의 자리에 오른다. 그러다 2차 아편전쟁 이후 함풍제가 붕어하고 자신의 아들인 동치제가 6세의 나이로 즉위하면서, 함풍제의 정실 황후인 동태후와 더불어 황태후 자리에 오른다.
    함풍제는 죽기 전 아들 동치제의 섭정을 두 태후가 아닌 8명의 보정대신들에게 맡겼다. 서태후는 이에 불만을 품고 동태후와 함풍제의 동생 공친왕과 연합하여 보정대신들을 몰아내고 자신과 동태후, 공친왕 섭정 체제를 확립하는데 성공하는데 이것이 바로 기상 정변이다.
    공식적으로는 2명의 태후가 섭정하는 것이었지만 동태후는 글도 몰랐고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기에 사실상 서태후의 단독 섭정 체제였으며, 이후 자신에게 방해가 될 공친왕도 권력을 약화시키면서 서태후는 청나라의 1인자가 되었다.

    그러나 거리낌 없던 서태후의 섭정도 아들 동치제가 친정을 할수 있는 나이가 되면서 위기를 맞는다. 동치제는 엄격한 어머니였던 서태후보다 다정한 양어머니 동태후를 더 좋아했는데, 그러다보니 서태후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런 둘의 갈등은 동치제가 동태후가 추천한 후보를 황후로 간택하면서 더욱 커져간다.
    아들에 대한 애정보다 권력욕이 컸던 서태후는 아들과 며느리 사이를 이간질하였으며, 아들이 환관들의 꼬임에 넘어가 여색에 빠져 기생집을 돌아다니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묵인하였다. 결국 이런 방탕한 생활로 인해 동치제는 성병에 걸려 19살의 어린 나이에 요절하며 아내 효철의황후는 서태후와 동태후의 강압에 못 이겨 자살을 선택한다.

    서태후는 아들의 장례를 치르기도 전에 재빨리 자신의 여동생과 순친왕 혁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즉 동치제의 이종사촌동생이자 자신의 조카인 4살 재첨을 양자로 맞아 즉위시키는데 이가 바로 광서제다.
    그뒤 1881년에 눈엣가시였던 동태후가 급사하면서 사실상 서태후는 청나라 황실에서 유일한 황실 큰어른이자 실권자로서 4살짜리 황제를 방패로 청나라를 좌지우지하게 된다. 이후 광서제가 16세가 되면서 명목상 친정을 시작했지만 햇병아리에 불과한 아들에게 해코지를 할까봐 혁현이 앞장서 서태후의 섭정을 연장하자고 청하고 광서제의 황후를 아예 서태후의 조카로 정하는 등 서태후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출처: 나무위키 서태후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그녀는 야망이 대단한 여자였다고 한다. 어린 시절을 힘들게 보내고 17살에 자금성 궁녀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권력에 대한 욕망을 보였다. 그녀는 출중한 외모와 말재주로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궁녀 시절 서태후는 궁궐에서 고양이를 잃어 슬피 우는 연기를 펼쳐서, 황제인 함풍제의 눈에 들게 되었고, 후궁으로 책봉되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그녀는 처음에는 후궁이었으나 유일하게 아들을 낳아 황후가 되었는데 아들이 태어난 지 몇 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함풍제는 이른 나이에 죽게 된다. 이 때문에 그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서태후의 아들인 동치제가 6살의 나이에 황제로 즉위하게 된다. 어린 아들이 즉위하며 섭정을 하게 된 서태후는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기 시작한다.



    권력을 잡은 게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권력을 휘두른 방법을 비난하는 것이다. 그녀의 재위했던 시절은 19c 말이었다는 것을 근거로 당시 시대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고 반박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가 권력을 제대로 사용해 청나라를 강성하게끔 만들었다면 청나라는 그렇게 서양 제국들에 의해 몰락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일단 사치가 매우 심했다고 한다. 황실 역사상 최고라고 하니, 그녀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한 번 살펴보자. 그녀의 밥상에는 주식으로 30가지, 반찬으로 128가지의 산해진미가 올라왔는데 이 한 끼 상차림에 은 100만 냥이 들었다. 은 100만 냥은 당시 중국 농민들의 약 1년 치 식량이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부분의 왕실 사람은 품위 유지를 위해 어느 정도의 사치는 필수였다고 하나, 서태후는 그 선을 훨씬 넘어섰으며 당시 청나라가 외세의 침략으로 무너지는 상황이었다는 점이 서태후가 비난받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진귀한 음식에도 관심이 많고 식탐 또한 커서 한 끼에 128가지나 되는 음식을 먹었는데 이는 돈으로 환산하면 100냥으로 중국 농민의 약 1년치 끼니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농민 1000여명을 먹여살릴수 있는 수준이자 이를 현대의 물가로 환산하면 2000년 전후 한국을 기준으로 약 8천만원 정도입니다.

    또 서태후는 절대 같은 음식을 3번이상 먹지 않았고 관상용으로 호화스런 음식을 가득 차려 따로 내놓거나 과일을 디퓨저마냥 소비하는 일도 많았으며 한번 먹은 음식은 두번 다시 입에 대기 꺼렸습니다.

    고기 외에도 제비집과 상어지느러미로 만든 요리를 좋아했고 후식으로 과일, 사탕, 떡을 즐기다보니 서태후가 전용열차를 타고 지방에 가는 날이면 16칸 열차에 4칸이 주방, 식사준비를 하는 수행요리사만 50~100명이나 되었습니다.

    서태후는 자신의 위엄이 훼손되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하여 누군가가 자신의 시야를 가리는 것을 매우 싫어해 궁인들의 시중을 받을 때에도 자신의 측면에 서게 했으며 이화원에 거주시 자신과 통화하는 상대방이 건방지게 누워 통화하는지 확인할수 없어 전화를 설치하지 않았고, 운전기사도 무릎을 비스듬히 꿇고 차를 운전해야해서 서태후가 탄 차는 늘 잔사고가 많았으며

    옷은 3000여벌이나 되고 옷을 담는 박스가 700박스가 넘었으며 옷, 버선, 신발을 만드는데 3000명가량 동원되었고 그 비용은 매년 만냥 정도가 들었습니다.

    서태후가 가장 욕을 먹는 이유는 이화원에 쓴 은전 3000만냥은 당시 청나라 전체 1년 예산에 30%에 달하는 수치로 이 막대한 돈이 정원 건설에 낭비되었고, 청일전쟁에서 피를 본 직접적인 원인은 총체적인 청군의 난맥과 지휘관들의 무능이지만 이 돈이 헛되이 낭비된 것도 청일전쟁에서 피를 본 중요한 원인 중 하나라는 점은 중일 양국의 사학자들도 인정하고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