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세기 유럽의 산업혁명 이후 서양의 이양선이 조선에 자주 출몰하고 이들이 통상 요구를 하면 해금 정책으로 거부, 그러나 조난된 선원들에게는 먼 곳에서 온 사람들에게 최대한 관용을 베푼다는 유원지의 원칙으로 처리했습니다.
1860년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의 공격으로 베이징이 함락, 청나라 함풍제가 피난간 사실이 알려지나 조선의 조야에서 위기감이 확산되며 영국과 프랑스, 청나라와의 강화를 중재한 러시아가 그 대가로 연해주를 얻으면서 조선은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게 됩니다.
이 무렵 집권한 흥선대원군은 러시아의 위협을 막고자 프랑스 세력을 끌어들이려 하나 성사되지 않았고 러시아의 국경 침범과 통상 요청이 기우였다는 것이 드러나고 청나라에서 천주교를 탄압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니, 천주교를 금해야 한다는 대신들과 유생들의 주장이 이어지게 되고 대원군은 천주교와 자신의 무관함을 과시하듯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합니다.
대원군은 병인박해를 계기로 발생한 병인양요를 물리치고 바다의 관문을 굳게 지킬 것이며, 외국배는 삼가 통과할 수 없다 라는 비석을 덕진돈대 앞에 세워 폐관자수의 의지를 내외에 선포합니다.
1868년 발생한 오페르트 남연군묘 도굴사건은 서양인에 대한 반감을 더 부추기고 1871년에는 1866년 발생한 제너럴셔면호사건을 계기로 미국과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신미양요 후 대원군은 척화비를 세우며 서양을 배척하는 정책을 더 강화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