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시와 광역시 지명의 유래가 어떻게 되나요??

2019. 12. 12. 16:24

서울특별시, 인천광역시, 대전광역시 등 특별시와 광역시로 되어 있는 도시 이름의 유래가 어떻게 되나요??

제가 현재 거주하고 있는 인천의 경우에는 대략적으로 미추홀이라는 지명에서 경원, 인주로 불리다가 그 이후 인천이란 지명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하는데,

다른 특별시나 광역시의 지명 유래가 궁금합니다.


총 1개의 답변이 있어요.

서울특별시
서울이라는 명칭은 『삼국사기』·『삼국유사』 등의 기록에 보이는 서벌(徐伐)·서나벌(徐那伐)·서라벌(徐羅伐)·서야벌(徐耶伐) 등에서 비롯되어 변천된 것으로, 이러한 칭호는 신라 초기 도읍지의 지명인 동시에 국명이기도 하였다.

인천광역시
『삼국사기』에 "졸본 부여 주몽의 아들 비류와 온조 형제가 남하하여 형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에 도읍하였다."고 전한다. 같은 자료에는 미추홀과 함께 인주(仁州) · 경원(慶源) · 매소(買召)라는 지명이 동시에 나와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태조원년(1292) 경원부에서 인주로 강등되었다가 태종 13년에 인천군(仁川郡)으로 되었다."라고 하여 처음 인천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부산광역시
1402년(태종 2) 1월 28일 태종실록에 富山이라는 이름이 처음 보이며, 경상도지리지(1425년) , 세종실록지리지(1454년), 경상도속찬지리지(1469년) 따위에 “동래부산포”라 하였고, 1471년 편찬된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에도 “동래지부산포”라 하고, 같은 책 삼포왜관도에도 “동래현 부산포”라는 기록이 있다. 이때 부산포는 “부자 富”를 썼다. 1470년(성종 1년) 12월 15일의 성종실록에 釜山이 처음 나타나는데, 1474년 4월 남제가 그린 부산포지도에는 여전히 富山이라 쓰고 있어 이 시기는 두가지 표기가 같이 쓰였다. 그러나 이후 기록은 부산포(釜山浦)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부산의 지명변천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동국여지승람(1481년)이 완성된 15세기 말엽부터, 釜山이라는 지명이 일반화 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전광역시
원래 조선 시대의 공주목 유성현 · 회덕현 · 진잠현에 속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공주)의 "대전천은 유성현 동쪽 25리에 있으니 전라도 금산군 경계에서 나왔다."는 기록에서 '대전(大田)'이라는 지명이 처음 확인된다. 그러나 이 기록의 대전은 대전천이라는 자연 지명의 일부였을 뿐 취락 명칭은 아니었다. 『대전지명지』에는 우암 송시열의 장례에 관한 일기인 『초산일기』의 내용 중 "상여를 메는 등의 인부는 주산 · 마산 · 사현 · 와지 등 4개 부락과 배달촌 · 대전 · 사오 · 초동의 사창계(社倉契)에서 차출한다."는 기록을 인용하면서 취락으로서의 대전이라는 지명이 1600년대 말의 자료에서 처음 확인된다고 하였다. 조선 시대 이 지역에 거주하던 충주 박씨의 『별급문서』 내용 중 '산내면 대전 구포평(大田九浦坪)'이라는 기록과 『임원경제지』의 "대전장(大田場)은 산내면 '대전'에서 2일과 7일에 선다."라는 기록, 그리고 『1872년지방지도』(공주)의 주기(註記) 등을 통해서 볼 때, 취락 명칭으로서의 대전이라는 지명은 적어도 17세기부터 존속하였음을 볼 수 있다. 다만 18세기에 간행된 『여지도서』와 공주의 읍지인 『공산지』(1859) 등 18~19세기 국가 행정 자료에는 대전이라는 취락명이 확인되지 않는 것을 보면, 당시까지의 대전은 행정리가 아닌 자연 마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대구광역시
대구(大丘)라는 지명이 기록에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는 757년(신라 경덕왕 16)으로 달구화(達句火)현이 대구(大丘)현으로 개칭되었다. 조선 영조 때, 대구 유학자 이양채는 공자의 휘에 '구(丘)'가 들어간다는 이유에서 대구의 '구(丘)'를 '구(邱)'로 개칭할 것을 상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조 이후 '구(丘)'와 '구(邱)'가 혼용되다가 철종 때부터 '구(邱)'로 굳어져 지금에 이른다. 『고려사』에 의하면, 1018년(고려 현종 9)에 대구현이 경산부 관내로 내속되었다. 1394년(태조 3) 수성현·해안현·하빈현이 대구현에 영속되었다가 다음해에 경주에 이속·변경되었고, 1414년(태종 14)에 다시 대구현으로 영속되었다. 1419년(세종 1) 대구현이 대구군으로 승격되었고, 1466년(세조 12) 대구군이 대구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601년(선조 34) 경상감영이 안동부에서 대구부로 옮겨왔다. 1895년(고종 32) 경상도가 대구부·안동부·진주부·동래부 등 4개부로 분할되었고, 대구도호부가 대구부의 대구군으로, 현풍현이 현풍군으로 개편되었다. 대구부는 산하에 23개 군을 관할하게 되었다.

광주광역시
삼국사기지리지』에 "노지(奴只 · 냇)였다가 무진주(武珍州 · 무들골)와 무주(武州)를 거쳐 940년(고려 태조 23) 처음 광주(光州)라고 칭했다."는 기록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광산)에 따르면 후백제 견훤 때부터 광주라 불렀으며, 현의 남쪽 2리에 있는 석서정(石犀亭) 기(記)에 이색(李穡, 1328~1396)이 '광지주(光之州)'라 언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980년대부터 별칭으로 사용되는 '빛고을'은 이 기록에서부터 유래되었다.

울산광역시
울산(蔚山)은 본래 울주(蔚州)가 변한 지명이다. 『삼국사기지리지』에 "하곡현(河曲縣)은 파사왕 때 굴아화촌(屈阿火村)을 빼앗아 현을 설치한 곳인데, 경덕왕이 고친 이름으로 지금의 울주(蔚州)이다."라는 기사에서 처음 등장한다. 『세종실록지리지』(울산)에는 "고려에서 울주군(蔚州郡)으로 고쳐 현종 9년(1018)에 방어사를 두었고 태조 6년(1397)에 비로소 진을 설치하고 병마사로서 지주사(知州事)를 겸하게 하였는데, 태종 13년(1413)에 진을 폐지하고 지울산군사(知蔚山郡事)로 고쳤다."라고 하여 1413년(태종 13)에 비로소 울산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2019. 12. 13.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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