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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문어80
조용한문어8023.07.22

영조의 중전이었던 정성황후는 자식이 없었나요?

사도세자가 왕과 중전의 아들인 줄 알았는데 영빈이라는 생모가 따로 있더라구요.

사도세자는 어려서부터 세자의 자리에 있었던 걸로 아는데 정성황후는 긴 시간동안 자식이 없었던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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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성은 서씨(徐氏)이며 존호(尊號)는 혜경장신강선공익인휘소헌(惠敬莊愼康宣恭翼仁徽昭獻), 휘호(徽號)는 단목장화(端穆章和)이다. 달성부원군 서종제(徐宗悌)의 딸로 1692년(숙종18)에 태어났다. 1704년(숙종 30) 연잉군(延仍君)과 혼인하여 달성군부인(達城郡夫人)으로 책봉되었고, 1721년(경종 1) 연잉군이 왕세제(王世弟)로 책봉됨에 따라 세제빈(世弟嬪)이 되었다. 1724년 왕세제 연잉군이 경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으며 이때 영조의 나이는 31세, 정성왕후의 나이는 33세였다. 정성왕후는 당쟁으로 인해 어지러운 정국 속에서 소생까지 없었으나 후궁 영빈 이씨 소생의 사도세자(思悼世子:장헌세자)를 매우 아꼈다. 사도세자와 영조 사이의 갈등을 풀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중 병을 얻어 창덕궁 관리각(觀理閣)에서 66세로 사망하였다. 능은 경기도 고양(高陽)시 용두동 서오릉 능역(陵域)의 홍릉(弘陵)이다.

    출처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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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영조의 왕비였던 정성왕후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데다 자식까지 없음에도 조선시대 왕비 중 가장 긴 33년간 왕비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탕평책으로 누그러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치열한 당쟁, 영조와 사도세자의 반목 등 어지러운 정국 속에서 더구나 의심 많고 특이한 성격의 영조 눈 밖에 나 내쳐지지 않고 왕비의 자리를 지켰다는 건 2인자로서의 완벽한 처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조는 정성왕후가 66세로 세상을 떠나자 홍릉을 조성하고 훗날 자신도 묻히겠다며 옆에 유택을 지었다고 하지만 막상 영조는 홍릉이 아닌 동구릉에 51세 연하의 계비인 정순 왕후와 나란히 묻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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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순왕후는 남편과의 불화로 인해 영조와의 사이에서 소생은 없었는데 그 불화의 원인으로 야사에는 정성왕후가 연잉군 시절의 영조에게 시집온 첫날 있었던 일 때문에 소박을 맞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혼인 첫날밤 영조가 정성왕후의 "손이 참 곱다"며 감탄했는데 정성왕후가 무심코 "반가에서 태어난 덕에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아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여 영조의 눈 밖에 났다는 것이다. 보기에는 이게 소박맞을 만큼 잘못한 말인가 싶겠지만 영조에게는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마누라의 대답을 출신이 미천한 자기 어머니인 숙빈 최씨를 모욕한 것으로 잘못 받아들인 것이다. 숙빈 최씨는 천한 무수리 출신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출신이 불분명해서 어렸을 때 고생을 많이 한 탓에 손마디와 뼈마디도 굵고 손이 되게 거칠었다고 한다.


    정성왕후의 조카인 서덕수 때문에 곤경에 처한 일이 있어서 영조가 정성왕후를 미워하게 됐다는 분석도 있다. 서덕수는 다름아닌 경종을 죽이고 연잉군을 옹립하려는 삼수의 옥의 주모자 중 하나였으며 영조에게 "저하를 위해 모의하고 있으니 알아두시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덕분에 영조는 이복형 경종 앞에서 폐세제를 자처하며 무릎 꿇고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저하를 위해 모의한다는 서덕수의 발언을 세상에 알린 게 다름아닌 영조인 만큼 저 말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삼수의 옥을 수사하던 도중에 목호룡의 고변에서 영조의 첫 아들 효장세자를 낳은 정빈 이씨의 죽음도 서덕수가 경종 암살을 위해 구한 독약의 시험 대상 겸 정성왕후의 경쟁자 제거를 위해 정빈 이씨에게 독을 먹였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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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7.22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네. 기록에 따르면

    영조의 부인이었던 정성왕후는 자녀가 없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아래와 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혼인 첫날 밤 연잉군이 그의 손을 보고는 왜 이리 곱냐고 물어보자 고생을 안 한 덕에 손에 물을 묻히지 않아 그리하였다고 대답하니 연잉군이 자신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를 깔본 것으로 간주하고 이후로 찾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영조의 정비이면 재임기간이 가장 길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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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남편과의 불화로 영조와의 사이에서 소생은 없었습니다.

    다만, 생전에 정빈 이씨 소생인 효장세자와 영빈이씨 소생인 사도세자를 친 아들처럼 아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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