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도병마사가 확대된 이유?
국방문제와 같은 예측불가능한 중대한 일을 처리할 때만 열렸던 임시기구인 도병마사가 몽골의 침략과 원간섭기를 거치면서 어떻게 중서문하성과 같은 역할로 확대개편 된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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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의 답변이 있어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도병마사는 국방 문제 의논하기위한 회의체입니다.
1231년~1259년까지 지속된 몽골의 침입은 당연히 국방 문제였으므로 자주 모였을거고 모인 김에 국사를 의논했을 겁니다.
실제 도병마사가 도당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건 고려 고종(재위: 1213~1259) 말기입니다.
도병마사는 임시기구에 불과했고 고려 후기에 접어들어 도병마사에서 국방문제는 물론 국가의 중요 업무를 함께 의논하게 되면서 도평의사사로 기능이 확대됩니다.
도병마사가 도평의사사로 바뀐 것은 충렬왕 때의 일입니다.
도병마사가 원의 내정 간섭때 관제 격하로 중서문하성과 중추원이 폐지되자 국정의 최고기관이 도평의사사로 바뀌었다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고려 후기에는 결정된 사항을 시행하는 행정기관의 기능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중앙 여러 관청을 총령하고,
지방의 제도안렴사(諸道按廉使)에게
직첩하는 명실공히 일원적인 중앙최고기관이 되었다. 이것은 고려 국정의
중심이 전기의 중서문하성에서 후기의 도평의사사로 옮겨졌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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