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경종 임금의 생모인 장희빈은 어떤 이유로 사약을 받았나요
조선국왕의 생모인 장희빈은 국왕의 생모였지만 남편인 숙종으로부터 사약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어떠한 이유에서 장희빈은 사약을 받았는지 그 배경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694년 장희빈의 왕비 책봉 이후, 세력을 잡고 있었던 남인들이 밀려나고 서인들이 다시 집권하는 갑술환국이 일어납니다.
정권의 교체와 함께 폐출됐던 인현왕후가 다시 복위되고, 왕비가 되었던 장옥정은 다시 빈으로 강등돼 취선당에 머물게 됩니다.
그런데 1701년, 인현왕후 민씨가 죽으면서 장희빈은 또다른 사건에 휘말리게 됩니다.
숙종의 총애를 받고있던 숙빈 최씨가, 인현왕후의 죽음이 장희빈의 저주 때문이라고 숙종에게 밀고했던 것인데요.
당시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현장이, 바로 취선당 뒤편의 사당입니다.
인현왕후를 상징하는 인형을 만들어 바늘을 꽂거나 화살을 쏘았다, 또 귀신에게 새옷을 지어주면서 인현왕후를 죽여달라고 빌었다 이런 정도가 당시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인현왕후 사후(35살) 2달뒤 최숙빈의 고변으로 인해, 장희빈은 마침내 사약을 받게 되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희빈 장씨는 1701년 인현왕후가 죽은 뒤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발고로 거처인 취선당에 신당을 차려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해 죽게 했다는 혐의를 받아 사사되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숙종의 빈(嬪) 장씨(張氏). 품계는 소의(昭儀). 숙종이 오래도록 아들이 없자 궁녀이던 그를 가까이하여 1688년(숙종14) 왕자 균(昀 : 경종(景宗))을 낳았다. 왕은 기뻐하여 세자로 봉하려 하였으나 송시열 등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西人)이 지지하지 않으므로 남인(南人)들의 원조를 얻어 책봉하려 하였다. 이에 서인의 노소론(老少論)은 모두 아직 왕비 민씨(民氏)가 나이 많지 않으니 후일을 기다리자고 주장하였다. 숙종은 듣지 아니하고 1689년(숙종 15) 정월에 세자를 봉하고 장소의를 희빈(禧嬪)으로 봉한 후, 이해 5월에 다시 민비를 폐하고 장희빈을 올리어 왕비로 삼았다. 기사환국 후 시간이 감에 따라 숙종은 폐비(廢妃) 사건을 후회하고, 장씨를 다시 희빈으로 내리었다. 그 후 왕비 민씨가 죽은 다음에 장희빈이 취선당(就善堂) 서쪽에다 신당(神堂)을 설치하고 민비가 죽기를 기도한 일이 발각되었다. 이 일에 관련된 희빈과 그의 오빠 장희재는 살해되고, 궁인(宮人)ㆍ무녀(巫女)와 그 족당(族黨)도 화를 입게 되었다. 숙종은 이후 빈어(嬪御)에서 후비(后妃)로 승격되는 일을 없애는 법을 만들었다.
출처 :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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