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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6

을지문덕 장군의 업적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역사책에서 배웠는데 을지문덕의 장군에 대해서 역사에 기록된 책자가 있나요? 을지문덕의 업적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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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을지문덕은 삼국시대 살수에서 수나라 군대를 물리친 고구려의 관리이자 무신이다. 생몰년은 미상이다. 612년(영양왕 23) 수 양제가 100만이 넘는 대규모 군단을 편성해 고구려에 침공했다. 육군은 요동성을, 30여만의 별동대는 평양성을 목표로 진격했다. 을지문덕은 별동대를 평양성까지 유인하면서 지치게 만드는 전략을 구사했다. 전의를 상실한 수나라 군대가 회군을 결정하고 살수를 건널 때 일대반격전을 벌여 30여만의 병력 중 불과 2700명만 살아서 도주하는 괴멸적 타격을 입혔다. 이 살수대첩은 수 양제에게 총퇴각을 결심하게 만들었다.

    612년(영양왕 23) 수나라는 양제(煬帝)의 총지휘 아래 대규모의 군단을 편성해 고구려에 대한 침공을 감행하였다. 이 때 육군은 고구려의 주요 군사거점인 요동성(遼東城: 지금의 遼陽)을 공격하였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우중문(于仲文) · 우문술(宇文述) 등을 지휘부로 한 30만 5,000명의 별동부대를 구성해 수군과 더불어 고구려의 국도(國都)인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수나라의 별동대가 압록강 서쪽에 집결하자 을지문덕은 거짓 항복을 청해 적진으로 들어가 직접 수나라 군세의 실상을 정탐하였다. 이때 수나라군이 군량이 부족하다는 점을 간파하였다. 돌아온 후에는 수나라군과 충돌할 때마다 패한 척 도망가는 작전을 구사하며, 평양성 부근까지 유인하여 극도로 지치게 만들었다.

    또한 전의를 상실하고 후퇴의 구실을 찾던 수나라군에게 “신통한 계책은 천문을 헤아리며 묘한 꾀는 지리를 꿰뚫는구나. 싸움마다 이겨 공이 이미 높았으니 족한 줄 알아서 그만둠이 어떠하리(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라는 희롱조의 오언시(五言詩)를 보내 수나라 군대의 회군을 종용하였다.

    을지문덕은 수 양제에 대한 영양왕(嬰陽王)의 알현 등을 제시하며 거짓 항복을 청해 수나라군에게 퇴각의 구실을 만들어주었다. 식량 부족과 피로로 곤경에 처해 있던 수나라군은 이를 받아들여 회군을 결정하였다. 이에 을지문덕은 일대 반격전을 전개하였다. 살수를 건너는 수나라군을 배후에서 공격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이때 수나라 별동부대는 장수 신세웅(辛世雄)이 전사하는 한편, 30만 5,000명에 이르렀던 병력 중 불과 2,700명만이 살아서 도주하는 등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에 양제는 수나라군의 총퇴각을 결심하게 되었다. 고구려가 대수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이 싸움을 '살수대첩'이라 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을지문덕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23.05.26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612년 수나라의 장군 우중문, 우문술이 30만 5천명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로 들어와 압록강에 대치할때 그는 거짓항복으로 혼자 적진으로 들어가 수나라 군의 약점을 정탐했고 적군이 이 사실을 알고 추격하자 평양성 30리 밖까지 유인, 뒤늦게 수나라군이 도망치려하자 미리 준비한 고구려군은 살수에서 맹공격을하여 큰 승리를 거두는 살수대첩이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여수장 우중문이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수나라 장수인 우중문에게 공을 세운 것을 치하하며 만족하고 그만 돌아갈 것을 완곡히 표현하였으나 우중문은 우매하게도 수나라 병사들을 사지로 모는 행동으로 을지문덕 장군에 의해 100만대군이 궤멸되는 수모를 겪는 살수대첩의 희생자가 되고 맙니다.


  • 안녕하세요. 엄재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을지문덕은 고구려 영양왕(재위: 590년 ~ 618년) 때의 장군입니다

    고구려와 수(隋)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서 활약하였습니다. 수의 2차 침공 때 뛰어난 지략을 발휘하여 수의 30만에 달하는 별동대의 공격을 잘 막아내었을 뿐 아니라, 후퇴하는 적군을 살수에서 전멸시켜 고구려의 대승을 이끌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 을지문덕의 생애와 업적

    고구려 영양왕 때의 명장.


    612년에 수나라의 장군 우중문·우문술이 30만 5천여 명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로 쳐들어와 압록강에 대치하고 있을 때 그는 거짓 항복을 하고


    혼자서 적진으로 들어가 수나라 군의 약점을 정탐하고 돌아왔다.


    적군이 이 사실을 알고 추격하자, 평양성 30리 밖까지 유인하였다.


    뒤늦게 속은 것을 깨달은 수나라 군이 도망치려 하자,


    미리 준비하고 있던 고구려군은 살수(지금의 청천 강)에서 맹공격을 가하였다.


    이에 수나라 군사는 겨우 3천여 명만 살아남아 달아나고, 고구려가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이 싸움이 바로 살수대첩이다.


    을지문덕은 침착·대담하고 지략과 용맹이 뛰어났으며, 시와 문장에도 능하였다.




    # 2. 을지문덕, 을지의 유래




    ‘을지’라는 성에 대하여 고구려 관위명(官位名)의 하나인 우태(于台)와 같이


    연장자·가부장(家父長)을 뜻한다는 해석이 있는가 하면,


    ‘을’만이 성이요 ‘지’는 존대의 접미사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또, 선비족(鮮卑族) 계통의 성인 ‘울지(尉遲)’씨와 같은 것으로 보아


    을지문덕을 선비족계통의 귀화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자치통감》에는 위지문덕(尉支文德) 이라고도 표기하였다.


    《삼국사기》 을지문덕전에서는 그의 세계(世系)를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해동명장전 海東名將傳》에는 “을지문덕은 평양 석다산(石多山) 사람이다.”고 하였다.



    # 3. 수나라의 총퇴각, 살수대첩


    612년(영양왕 23) 수나라는 양제(煬帝)의 총 지휘 아래 대규모의 군단을 편성하여 고구려 침공을 감행하였다. 이때 육군은 고구려의 주요군사거점인 요동성(遼東城: 지금의 遼陽)을 공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우중문(于仲文)·우문술(宇文述) 등을 지휘부로 한 30만5000명의 별동부대를 구성하여 해군과 더불어 고구려의 국도인 평양성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별동대가 압록강 서쪽에 집결하였을 때, 을지문덕은 왕명을 받들어 거짓 항복을 청하여 적진으로 들어가 군량이 부족한 수나라군의 약점을 간파하고 돌아와서 수나라군의 군사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작전으로 수나라군과 충돌 때마다 패주하는 척하면서 평양성부근까지 유인하여 수나라군을 극도로 지치게 만들었다.


    또한, 전의를 상실하고 후퇴의 구실을 찾던 수나라군에게 “신통한 계책은 천문을 헤아리며 묘한 꾀는 지리를 꿰뚫는구나. 싸움마다 이겨 공이 이미 높았으니 족한 줄 알아서 그만둠이 어떠하리(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라는 희롱조의 오언시를 보내어 회군을 종용하는 한편, 수양제에 대한 영양왕의 알현 등을 조건으로 거짓항복을 청하여 퇴각의 구실을 만들어 주는 척 하면서 일대 반격전을 전개하였다.


    살수(薩水:지금의 청천강)를 건너는 수나라군을 배후에서 공격, 수장 신세웅(辛世雄)을 죽게 하고 불과 2,700명만을 살려 보내는 대전과를 거두어, 수나라군의 총퇴각과 고구려의 승리를 가져다 준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이를 ‘살수대첩’이라 한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영양왕 대의 고구려-수 전쟁 당시 고구려를 지켜낸 불세출의 명장. 많은 기록이 남아있지는 않으나 수나라와 고구려가 국가의 존망을 걸고 맞붙었던 2차 고구려-수 전쟁에서 고구려군을 지휘하여 살수대첩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승리를 거두는 등 대승리를 거두어 고구려를 구해낸 전쟁 영웅이다.

    -출처: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