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녕대군은 왜 왕위에 오르지 못한 건가요?
양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었었는데
결국 충녕대군인 세종대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로인해 훈민정음이 세상에 나올 수 있겠었으나
왜 세자였던 앙녕대군이 세자 자리에서 폐위되었나요?
그리고 추방까지 당한 기록이 있던데
어떤 사건으로 최악의 상황까지 가게 만들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양녕대군은 이방원과 원경왕후 내외로부터 특별한 아들이었기 때문에 양육방식에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양년대군은 선대왕 태조와 부왕 태종의 호색 및 냉혈 성향만 물려받은 인물이라고 평하고 있습니다.
그는 술과 사냥, 여자 등 당대의 노는 것이라면 사족을 못써 안팎으로 온갖 사고를 쳐 점점 부왕과 조정의 눈밖에 나더니 어리와의 간통 사건을 기점으로 왕가의 여론이 악화됨과 동시에 폐세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세자의 지위를 잃고 대군으로 격하된 본인뿐만 아니라 왕세자비였던 자기 아내와 자녀들의 미래까지 대군의 아내와 자식으로 강등됨으로서 완전히 망쳐버렸다고 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권기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쉽게 생각하면 유교이념 성리학이념에서 보면 적장자가 왕위를 잇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조선에서 적장자가 왕위를 잇는 것은 극히 드물죠.
그러한 아주 대표적인 일례가 양녕대군의 일인데. 양녕은 장자라는 이유로 세자가 되었으나 활쏘기, 음주가무를 좋아하는 성향이라 결국 공부도 좋아하고, 인품이 좋았던 충녕대군으로 새자가 바뀌게 되었죠.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양냥 대군은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부왕 태종과 마찰을 빚다가 유정현(柳廷顯) 등의 상소로 폐위되었다고 합니다. 그 뒤 셋째 아들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왕세자가 되었습니다. 세자 폐위 이후에도 자유분방한 활동이 문제가 되어 여러 번 탄핵을 당하였으나 세종의 각별한 배려로 처벌을 받은 적은 없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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