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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23.12.07

영조는 정말 사도세자를 죽일 의도가 있었을까요?

아무리 많은 범행을 저질렀다고 해도 아들인데, 왕위 계승을 위해 어쩔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정말 악의를 품고 죽이려 마음 먹은 건가요? 아니면 그냥 벌만 주려고 했던건가요 ? 영조의 마음이 궁금하네요

이러한 기록이 전해지는것이 있나요? 또 왜 하필 뒤주 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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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5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일 의도가 분명히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조입장에서는 그나마 최대한 피를 보지 않는 방법으로 죽인 것입니다.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국왕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세자를 폐위시켜 사회로 격리시키거나 평범하게 살도록 조치할 수도 있었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는 사도세자의 광증이 날로 심해져 영조로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전문가 조유성 AFPK 입니다.

    ✅️ 어느정도 죽일 의도가 있었다고 보며, 그렇지 않았다면 뒤주에 가두고 1~2일 후에 꺼내 주라고 명을 했을 것입니다. 즉, 대놓고 죽이면 자기도 아들을 죽인 아버지가 되기 때문에 '뒤주에 넣어서 겁(?)만 주려고 했는데, 죽었다.' 이렇게 피력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도세자는 영조가 아껴서 어렸을 때부터 세자교육을 받았고 1739년(영조 15) 5살에 영조 대신 대리청정을 하였고 1742년 8살에 종묘에 참석하는 의식에 세자를 참여시켰는데 세자가 법도에 맞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모두 우러러 보았습니다. 1747년 궁안에 천연두가 발생하여 경덕궁으로 피신하여 문안을 드리지 못한 일이나 공식적인 만남이 있을 때만 만나고 만나기를 주선하는 사람이 있을 때만 만날 정도로 영조와 사도세자 간에는 친밀함이 적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세자교육을 강압적으로 받아왔고 영조가 직접 친문하는 지리에서 압박감을 느낀 세자는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하여 정신분열증을 앓게 되었고 이것이 궁녀를 겁탈하고 궁인들은 살해하는 만행으로 이어지고 급기야는 동궁을 사칭하면서 사가의 여인들까지 겁탈하는 만행들이 발생하기도 하자 왕실의 위기는 고조되었습니다. 1757년 1758년 사도세자의 병이 깊어지면서 발작할 때는 궁비와 횐시를 죽이고 괜찮아지면 후회하곤 했습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폐하려 했으나 폐하지 못했는데 영빈까지 세자의 일을 고하자 결국 폐서자 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폐서인이 되어 뒤주에 갇혀있던 세자는 5월 21일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아무래도 영주는 정치적인 목적과 더불어서

    사도세자의 기행 등으로 인하여 사도세자를

    폐하고 죽일 의도도 있었다고 보여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