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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ermaan
rogermaan23.05.21

일제시대 무용수 최승희는 실제로 뛰어난 무용가입니까

일제시대 근대화 시절 한국 여성으로는 드물게 현대무용을 개척한 최승희는 실제로도 뛰어난 무용수였습니까 아니면 초창기 하는 사람이 없어서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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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1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해방 이후 북한에서 조선무용가동맹위원장, 무용학교교장, 최승희무용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한 무용가입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11년 강원도 홍천에서 출생했다. 최준현(崔濬鉉)의 딸이며, 어머니는 박용자(朴容子)이다. 영화제작자 최승일(崔承一)의 동생이다. 1926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최승일의 권유로 경성공회당(京城公會堂)에서 일본 현대무용의 선구자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공연을 보고 무용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도일했다. 1926년 5월 본격적인 무용 수업을 위해 도쿄로 건너간 뒤 약 3년 만에 주역급 무용수로 발탁되었고, 수석대교(首席代敎)로 후진을 지도할 만큼 급성장했다. 1927년과 1928년 이시이바쿠의 조선공연에 참가하여 호평을 받았다. 1929년 귀국하여 경성에 무용연구소를 설립했으며, 이해 12월 찬영회가 주최하는 ‘무용·극·영화 밤’에 출연했다. 1930년부터 본격적인 무용공연을 시작했다. 이해 2월 개성에서 무용대회, 3월 창작무용공연회, 10월 제2회 공연회, 11월 대전에서 무용대회를 각각 가졌다. 1931년 문학가 안막(安漠)과 결혼했다. 이외에 「파우스트」·「광상곡」·「그들의 로맨스」·「그들의 행진곡」·「흙을 그리워하는 무리」 등 가극과 창작극을 발표, 공연했다. 이 시기 전국을 순회하면서 신문사 애독자 공연, 동정금 모금 공연 등 다채로운 공연을 했다.

    1933년 3월 이시이 문하로 재입문하여 약 1년 만에 청년회관에서 전통과 현대무용의 접목을 접목한 창작극 「에헤야 노아라」를 발표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36년 영화 「반도(半島)의 무희」에 출연했으며, 이해 말부터 4년간 세계무대로 진출하여 유럽에서는 「초립동」·「화랑무」·「신로심불로」·「장구춤」·「춘향애사」·「즉흥무」·「옥저의 곡」·「보현보살」·「천하대장군」 등 공연했다. 1938년 브뤼셀에서 개최된 제2회 세계무용경연대회에서는 심사위원을 맡았다. 1930년 미국 뉴욕에서는 당시 흥행계의 제왕으로 불리던 휴록(Hurok,S.)의 기획 아래 NBC전국체인과 제휴하면서 미국은 물론, 중남미 여러 나라에서 공연했다. 특히, 뉴욕 공연 후 ‘세계 10대 무용가의 한 사람’이라는 평을 받았다.

    중일전쟁 이후 전시체제기가 형성되면서 일제에 협력했다. 1941년 10월 일본 오사카(大阪)회관에서 협화회원을 위로하는 공연을 했으며, 11월에는 도쿄극장에서 조선군 보도부가 내선일체와 지원병을 선전하는 영화 「그대와 나」 시사회에서 「화랑의 춤」 등을 공연했다. 이해 11월 도쿄에서 공연한 수익금을 일본 육군성 휼병부(恤兵部)에 헌금했다. 1942년에는 조선군사보급협회에서 주최하는 무용공연에서 수익금 전액을 조선군사보급협회에 기부했다. 1944년에는 도쿄에서 24회 연속 독무공연을 했다. 이외에 일본의 전통예능인 노(能)·가부끼(歌舞伎) 등에서 소재를 얻어 「부콘(武魂)」·「오이와케(追分)」·「이케니에(生贄)」·「시즈고젠(靜御前)」 등을 발표했다.

    해방 직전 중국에서 위문공연을 하다 베이징에서 해방을 맞고, 1946년 5월 귀국했다. 친일행적이 문제가 되어 남편 안막, 오빠 최승일과 함께 7월 20일 월북했다. 월북 후 평양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설립하고 「반야월성곡」·「춘향전」 등 2편의 무용극과 소품 「노사공」 1편을 공연하는 등 창작활동을 했다. 1950년 베이징에 중앙희극원 무용반을 설립해 학생을 지도했다. 1950년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조선무용가동맹중앙위원회 위원장, 무용학교 교장, 국립무용극장 총장 등을 역임했으며, 1952년 공훈배우·1955년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 1958년까지 최승희무용학교에서 안무가로 활동했으나 남편 안막이 반당종파분자 혐의로 체포되자, 그 영향을 받아 최승희무용연구소도 폐쇄되었다. 1년간 자숙 후 1959년 「영광스러운 우리 조국」을 창작해 조선무용가동맹위원장으로 복귀, 1967년까지 활동했다. 1967년 숙청되어 가택연금의 처벌을 받았으며, 1969년 8월 8일 사망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최승희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11년 강원도 홍천에서 출생했습니다. 최준현의 딸이며, 어머니는 박용자입니다. 영화제작자 최승일의 동생입니다. 1926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최승일의 권유로 경성공회당(京城公會堂)에서 일본 현대무용의 선구자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공연을 보고 무용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도일했습니다. 1926년 5월 본격적인 무용 수업을 위해 도쿄로 건너간 뒤 약 3년 만에 주역급 무용수로 발탁되었고, 수석대교(首席代敎)로 후진을 지도할 만큼 급성장했습니다. 1927년과 1928년 이시이바쿠의 조선공연에 참가하여 호평을 받았습니다. 1929년 귀국하여 경성에 무용연구소를 설립했으며, 이해 12월 찬영회가 주최하는 ‘무용·극·영화 밤’에 출연했습니다. 1930년부터 본격적인 무용공연을 시작했습니다. 이해 2월 개성에서 무용대회, 3월 창작무용공연회, 10월 제2회 공연회, 11월 대전에서 무용대회를 각각 가졌습니다. 1931년 문학가 안막(安漠)과 결혼했습니다. 이외에 「파우스트」·「광상곡」·「그들의 로맨스」·「그들의 행진곡」·「흙을 그리워하는 무리」 등 가극과 창작극을 발표, 공연했습니다. 이 시기 전국을 순회하면서 신문사 애독자 공연, 동정금 모금 공연 등 다채로운 공연을 했습니다.


    1933년 3월 이시이 문하로 재입문하여 약 1년 만에 청년회관에서 전통과 현대무용의 접목을 접목한 창작극 「에헤야 노아라」를 발표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1936년 영화 「반도(半島)의 무희」에 출연했으며, 이해 말부터 4년간 세계무대로 진출하여 유럽에서는 「초립동」·「화랑무」·「신로심불로」·「장구춤」·「춘향애사」·「즉흥무」·「옥저의 곡」·「보현보살」·「천하대장군」 등 공연했습니다. 1938년 브뤼셀에서 개최된 제2회 세계무용경연대회에서는 심사위원을 맡았습니다. 1930년 미국 뉴욕에서는 당시 흥행계의 제왕으로 불리던 휴록(Hurok,S.)의 기획 아래 NBC전국체인과 제휴하면서 미국은 물론, 중남미 여러 나라에서 공연했습니다. 특히, 뉴욕 공연 후 ‘세계 10대 무용가의 한 사람’이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최승희 (1911년 11월 24일 ~ 1969년 8월 8일)


    무용가로 서울 출신이다. 최준현의 딸이며, 어머니는 박용자이다. 15세 되던 해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경성사범학교 연습과에 진학하여 음악교사가 되기를 희망하였으나, 나이가 어려 낙방한 뒤, 큰오빠 최승일의 권유로 경성공회당에서 일본 현대무용의 선구자 이시이 바쿠의 공연을 보고 무용가로의 입신을 결심하게 되었다.


    1926년 5월 본격적인 무용수업을 위하여 동경으로 건너간 뒤 약 3년 만에 주역급 무용수로 발탁되었고, 수석대교로 후진을 지도할 만큼 급성장하였으나, 1929년 여름 이시이의 돌연한 실명은 그녀의 진로에 커다란 변수가 되었다. 고향으로 돌아와 연구소를 개설하였고, 1930년부터 1932년까지 세 차례의 공연을 가지면서 ‘민족무용의 현대화’를 표방한 「영산무」를 발표하기도 하였으나, 주류는 역시 「인도인의 비애」·「해방을 구하는 사람들」·「방랑인의 설움」과 같은 현대무용 계열의 작품이었다.

    이들 작품은 진보적 지식인들의 호응을 얻기도 하였으나, 경제면에서는 어려움을 면치 못하였다. 1933년 3월 이시이문하로 재입문하여 약 1년 만에 청년회관에서 전통과 현대무용의 접목을 꾀한다는 의도에서 창작된 작품 「에헤야 노아라」가 대성황을 이루면서,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신인으로 무용평단과 언론의 각광을 받게 되었다.


    1936년 말부터 4년간 세계무대로 진출하여 유럽에서는 「초립동」·「화랑무」·「신로심불로」·「장구춤」·「춘향애사」·「즉흥무」·「옥저의 곡」·「보현보살」·「천하대장군」 등 신무용사의 기념비적 작품이 나왔고, 그 명성은 아르헨티나(Argentina,La)·상카(Shankar,U.) 등에 비유되면서 세계정상의 무희로 지목되었다. 1938년 브뤼셀에서 개최된 제2회 세계무용경연대회에서는 라반(Lavan, R.)·비그만(Wigman, M.)·리파르(Lifar, S.) 등과 나란히 심사위원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뉴욕에서는 파리무대의 후광을 업고 당시 흥행계의 제왕으로 불리던 휴록(Hurok,S.)의 기획 아래 NBC전국체인과 제휴하면서 미국전역은 물론, 중남미 여러 나라에서 공연하였다. 1940년 여름 일본으로 돌아왔으나 무용에 대한 동포들의 열기가 더해가자 일본의 경시청은 이것을 민족의식의 고양으로 간주하여 앞으로 공연 목록의 3분의 1을 일본적인 소재로 바꿀 것을 강요하였다.


    어쩔 수 없이 이에 굴복하여 일본의 전통예능인 노 · 가부끼 등에서 소재를 얻어 「부콘」·「오이와케」·「이케니에」·「시즈고젠」 등을 발표하지만,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일본 경찰의 중압에서 벗어나고자 황군 위문이라는 명분으로 연구소를 북경으로 옮기게 되었고, 거기에서 메이란팡 · 마렌량 · 샹샤오윈 등과 교우하면서 중국고전을 바탕으로 「향비」·「연보」·「패왕별비」 등의 10여 작품을 발표하였으나 옛 영화를 지탱할 만한 일품들을 내놓지 못한 채 광복을 맞이하였다.


    조국으로 돌아왔으나 “나에게 허용되는 속죄의 길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이제까지의 최승희 무용을 지양하고 코리안 발레를 창건하는 일”이라 하였던 말의 참뜻이 곡해되어 기회주의자로 언론의 빈축을 사기도 하고, 친일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중압감에 늘 불안해하다가, 때마침 대동월북하라는 사명을 띠고 남하한 남편 안막(安漠)을 따라 평양으로 넘어갔다.


    1950년까지 「반야월성곡」·「춘향전」 등 두 편의 무용극과 소품 「노사공」 한 편을 만드는 데 그치는 위축된 창작활동을 하였다. 평양에서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또는 최승희무용연구소 소장으로 일견 화려하게 비쳐지기도 하였으나, 혁명정신의 결여가 비판되고 끝내는 반동적 부르즈와예술의 표본으로 낙인찍혀 인민배우라는 예술인 최고의 지위에서 끌어내려졌다. 한때는 인민극장의 청소부로, 또 어떤 때는 생산공장의 서클지도원으로 강등시켜 냉대하였다고도 전해진다.


    1951년부터 1953년까지 북경에 머무르면서 중앙희극학원(中央戱劇學院)의 일부를 제공받아 100여 명의 제자를 가르치면서, 전쟁을 소재로 한 장편무용극 「유격대의 아들」과 소품 「조선의 어머니」 등을 발표하였으며, 평양으로 소환된 다음에도 이와 같은 양상은 변하지 않았다. 그 뒤 일선에서 물러나 재일교포 북송사업의 환영위원으로 근무했다.1967년 숙청되어 가택연금의 처벌을 받았으며, 1969년 8월에 사망했다. 2003년 김정일의 지시로 복권되어 형제산구역 신미리애국열사릉에 안치되었다고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