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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한발발이142
로맨틱한발발이14223.12.21

나라를 팔아 자신의 이득을 취한 이완용은 본래 어떤 사람이었나요?

을사조약, 정미7조약 등 우리나라를 사실상 일본에 팔아넘긴 매국노 이완용은 조선 후기 어떤 관료였나요?

친일행위를 하기 전 어떤 인물이었는지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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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12.21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평소 이완용은 내성적인 성격에 글 읽기와 시문 쓰기를 즐겼으며 술도 즐기지 않고 여 자도 밝히지 않았다고합니다. 청년 시절 그는 유교의 근본인 충효사상에 입각한 조선 선비의 풍모를 지닌 사람이었다고합니다.을미사변 사건에 충격을 받은 고종은 각국 대사관에 있는 외국인들과 친분이 있는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는데 이를을 주도한 인물 중 한 사람이 이완용이었습니다. 이완용에 대한 고종의 신뢰는 더욱 커졌고 이로써 이완용은 학부대신 뿐만 아니 라 외무대신, 농상공부대신까지 모두 겸직하게 됩니다. 이 시기 이완용이 정동구락부와 함께 만든 것이 독립협회와 독립문입니다. 조선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겠다는 이완용의 면모를 볼 수있는 연설문으로 이 시기 러시아, 미국, 프랑 스, 일본 등은 조선의 이권을 서로 차지하려하고 있었고 특히 러시아는 아관파천을 도와줬다는 것을 명분으로 조선의 내정 간섭은 물론이고 석탄 채굴건 등 여러 이권을 요구하게되는데 이완용은 그런 러시아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막아섰으며 이완용은 죽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고 나라 위해 옳은 일을 할 양으로 그 외국 공사의 책망과 외무대신들의 성냄을 받아가면서도 자기 할 일은 그 일을 방어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결국 러시아의 압력으로 이완용은 전라북도 관찰사 로 좌천되었고 독립협회에서 제명까지 되기까지했으며 고종은 즉위 40 주년을 맞아 일본으로부터 쓸모 없는 양무호를 사들였고, 미국에서 캐딜락 리무진을 사와 비싼 월급을 주고 일본인 운전기사를 고용하는 등 실정을 이어나갔습니다. 고종은 이완용을 다시 기용해 미국의 도움을 받으려 했으나 미국은 가쓰라 태프트 밀약으로 일본의 손을 들어줬고 일본은 포츠머스 강화조약으로 한 국에 있어서 일본의 우월권을 인정 받았습니다. 이 일을 겪으면서 이완용은 큰 충격에 빠졌고 이때부터 이완용은 친일파로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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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완용은 구한말의 관료이자 외교관으로써 일본 제국이 을미사변을 일으켜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늘린 후 김홍집 등을 중심으로 한 친일 내각이 정권을 장악하자 춘생문 사건과 아관파천을 일으켰습니다 이후에 독립협회에 합류했지만 친러파였다는 이유로 제명당했고, 양부인 이호준이 사망하는 등의 악재가 겹치자 몇년간 은둔해 있었고 1904년 복귀해 친일파로 전향하는 등 하여 한일병합조약, 정미7조약 등 모두를 체결하고 이를 주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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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완용은 먼 친척인 당대의 거물이었던 이호준의 양자로 입적하여 다른 대감댁 자제들과 비교 당하는 등 천대를 받았으나 임오군란 후 대윈군과 연을 끊고 고종부부와 손을 잡은 이호준의 도움으로 갑과 을과가 아닌 병과에 1등도 아닌 18등으로 합격했으나 반드시 거쳐야 할 규장각 대교를 거쳐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갑신정변으로 위기를 맞긴했으나 미국 외교관 생활과 1888년 동부승지 이조참의 외무참의를 지냈고 1890년 성균관대사성 형조참판 공조참판 우부승지내무참의 등 각종요직을 거쳤고 대한제국 내각의 대미협상을 맡게 됩니다. 갑오경장에 참여하고 을미사변으로 만민공동회에도 참여하였습니다. 아관파천으로 러시아제국의 영향력이 커지고 내정간섭이 심해지자 강력히 거부하고 친미주의적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이완용의 친미적 태도에 분개한 러시아는 고종에 압력을 가해 내무대신으로 평양관찰사로 좌천시켰습니다. 이후 전북관찰사로 좌천되고 직무태만으로 감봉 공금횡령죄를 짓기도 했습니다. 독립협회에서도 제명됩니다. 양부 이호준을 상을 당한 후 이완용 고종의 친미성향을 바탕으로 다시 재기용되면서 중앙정계로 진출합니다. 그러나 미국은 스페인과의 전쟁으로 필리핀을 전리품으로 확보하고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기 위해 일본을 이용하기 위해 가쓰라-태프트 밀약까지 체결한 상태였기 때문에 조선의 요구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이완용은 일본과 손을 잡고자 합니다. 1905년 을사늑약에 체결된 원인입니다. 양지만 찾아다니는 자에 의해 한나라가 결단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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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완용은 1858년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에 태어나 10세대 호조판서를 지낸 판중추부사 이호준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1882년 증광별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지, 주서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1886년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배운 것을 계기로 신문학 습득에 나섰습니다.

    1887년 주미특파전권공사 박정양(朴定陽)을 따라 참찬관(參贊官)으로 미국에 건너갔으며, 박정양 소환 이후 공사서리, 1880년 대리공사가 되었습니다. 이완용은 영어 교육을 받고 주미 외교관으로 활약하면서 친미개화파로 두각을 보였습니다. 미국에서 돌아와 갑오개혁 당시 1895년 박정양 내각에서 친미 개화파의 중심인물이 되었습니다. 이완용은 친러파의 중심인물인 이범진(李範晉)과 손을 잡고 친미, 친러 연합세력인 ‘정동파(貞洞派)’를 이끌었습니다. 이 시기 이완용의 입장은 청을 대신한 일본의 국정간섭을 막고, 미국과 러시아의 지원 아래 고종 중심이 개혁정권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관파천 당시 독립신문의 발간과 독립협회 창설을 지원하였습니다.

    한편 이완용은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의 간섭이 심해지자 반러적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경운궁 환궁 후에도 러시아 군대가 왕궁을 호위하고 군사교관, 재정고문을 파견하는 등 내정간섭이 심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때 관직에서 물러나 있다가 1905년 9월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학부대신으로 재등장하였는데, 관직에 다시 등장한 이완용은 과거 배일(排日) 친미주의자에서 친일파로 변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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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구한말의 관료이자 외교관, 친일반민족행위자.

    일본 제국이 을미사변을 일으켜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늘린 후 김홍집 등을 중심으로 한 친일 내각이 정권을 장악하자 춘생문 사건과 아관파천을 일으켰다. 이후에 독립협회에 합류했지만 친러파였다는 이유로 제명당했고, 양부인 이호준이 사망하는 등의 악재가 겹치자 몇년간 은둔해 있었다. 1904년 복귀해 친일파로 전향했다. 친일파로서 을사조약을 적극적으로 체결하고 고종의 강제 퇴위를 주도했으며, 정미 7조약, 기유각서,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여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유일하게 모두 포함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다. 그러다보니 후대에도 친일파, 매국노의 대명사격으로 일컬어지곤 한다.[12]

    정식으로 창씨개명한 이름은 리노이에 칸요(李家 完用). 한국 한자음으로 읽으면 '이가 완용'. '이씨 가문의 완용'이란 뜻이다. 사실 이완용 뿐만 아니라 창씨개명을 쓰던 동시대 대부분의 인물들이 자신의 한국명과 똑같거나 비슷하게 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았다.

    부정적 평가

    첫째, 일본과 러시아의 틈바구니 속에서 조선의 독립을 놓고 이리저리 애썼던 것만은 사실이나, 그에게 있어 독립이란 '근대적 국민 국가'로서의 독립보다는 왕실 보존 및 안위 문제로서의 '독립'이란 의미였다. 그 예로 미국을 끌어들이려 온갖 수를 다썼지만, 정작 미국을 본받아야 했던 보통교육, 참정권, 공화정, 노비 철폐 등은 전혀 도외시했고, 근대적 의회 정치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내거나 국가로서 세계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가장 기본적 조건인 근대 헌법 제정등에 전혀 한 일이 없다. 특히 이완용 등 수구파들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내놓은 대한국 국제라는 것은 왕권의 전통적 절대성만을 강조한 내용으로, 국민 모두를 아우를 지지와 합의를 이끌어낸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했다.

    둘째, 근대 개혁을 정부 주도로 하려했음에도 그 동력이 될 국가 예산이나 국가 재산 및 세수 확보에도 한 일이 없다. 수백년간 면세를 누려온 양반들, 특히 온갖 혜택을 독점한 문벌 세도가들이라든지, 왕실 종친들에게 사사로이 주었던 국가 전매 사업등, 근대화에 방해가 되는 사회 구조를 놔두고 이완용 등 수구파들이 한 짓은 각종 이권을 열강들에게 헐값에 넘기는 일 뿐이었다. 여기서 받은 얼마간의 돈은 왕실 재정과 일부 정부 요인들에게 도움은 됐을지언정, 이권을 넘겨 열강들이 마구 국부를 유출해가는 통에 정부 재정과 국민의 삶은 더욱더 피폐해져 갔다.

    게다가 일본에 나라를 판 후 대가로 불어난 그의 재산은 현재 추산 수조원에 달했고 가진 땅만 1억 3천만 평이 넘었어도, 을사조약 체결 직전 변명처럼 떠들었던 '나라가 다시 부강해지면 그 때가서 국권을 되찾으면 된다'는 말을 실현하기 위해 한 일이 전혀 없었고, 후배들과 역사에 전혀 본보기가 되지 못했다.


    셋째, 그의 리더십으로는 대한제국 정부 내각 내에서조차 합의를 이끌지 못하고 정적(政敵)들만 자꾸 생겼다. 이완용이 젊은 시절 주미공사관에 있을 때부터 수십년간 그를 지켜봐왔던 윤치호는 다음과 같은 인물평을 남겼다.

    나는 이완용을 대단히 싫어한다. 그의 특권의식, 야비한 교활성과 음흉함, 그와 같거나 열등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고집스럽고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는 굴욕적일 만큼 복종하는 태도, 이 모든 것이 나로 하여금 그에게 편견을 갖게 한다. 이완용은 철저한 기회주의자요 변절주의자 아부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이완용은 초창기 독립협회의 의장이었다. 독립협회의 구성원이 대부분 우습지만 일본과 가까운 사람들이 많았지만 말이다.
    - 윤치호 일기 내용 중에서-

    이완용의 조카 김명수가 이완용 사후 1주년을 기리기 위해 1927년에 저술한 책 《일당기사》

    또한, 이완용의 조카이자 이완용의 비서직으로 있던 김명수가 이완용을 기리기 위해 1927년 《일당기사(一堂紀事)》를 펴냈는데, 《일당기사》 내용 중에서 이완용의 가치관이 어땠는지를 엿볼 수 있다.

    나는 20세 때에 한학(漢學)을 숭상하고 산림학(山林學)에 종사했으나 존도숭유(尊道崇儒)의 풍이 퇴색하고 외국과의 교통이 확장되어 서양과의 교제가 절실하여 하루아침에 머리를 깎고 구미(歐美)로 갔다. 최초에는 조선인이 목적으로 하는 문과에 합격했다. 당시 미국과의 교제가 점차 긴요한 까닭에 신설된 육영공원에 입학했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갑오경장 후 을미년에는 아관파천 사건으로 노당(露黨·친러파)의 호칭을 얻었고, 그 후 러일전쟁이 끝날 때 전환하여 현재의 일파(日派·친일파) 칭호를 얻었다. 이는 때에 따라 적당함을 따르는 것일 뿐 다른 길이 없다. 무릇 천도(天道)에 춘하추동이 있으니 이를 변역(變易)이라 한다. 인사(人事)에 동서남북이 있으니 이것 역시 변역이라 한다. 천도, 인사가 때에 따라 변역하지 않으면 실리를 잃고 끝내 성취하는 바가 없게 될 것이다.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그가 이재명(李在明) 의사(義士)의 칼을 맞고 입원중, 자신을 간호하던 맏며느리 임건구와 간통을 하여 장남 이승구가 자살하였고, 며느리는 이완용이 첩처럼 데리고 살았다는 패륜적 성추문 마저 기록돼 있다.

    그런데 친일파 문제를 연구해온 윤덕한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에 따르면, 이완용이 며느리와 불륜을 저질러 아들이 자살했다는 이야기는 잘못된 사실이다. 윤덕한 연구원에 따르면, 이승구는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이전인 1905년 음력 7월, 자살이 아니라 병으로 죽었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허약했던 이승구는 사망 당시 26세였다. 며느리와의 불륜설도 잘못된 사실이다. 친일파이자 매국노인 이완용을 배척한 민중들의 감정이 담긴 이야기일 뿐, 술과 이성을 멀리하고 서예와 독서를 하는 사람이었다.

    이완용의 손자이자, 자식없이 죽은 큰아들(이승구)을 대신하여 장손으로 입적한 자인 이병길도 친일파였다.이완용이 죽은 뒤, 일제 후작 작위와 전재산을 상속 받은 병길은 조선귀족회 이사와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등을 지내며 일제에 적극 협력했다.


    넷째, 아래의 이른바 '긍정적 평가'의 이면엔 과연 무엇을 위한 타협이었나라는 근본적 의문이 존재한다. 나라가 없이 왕실이 무슨 소용이며 대다수 양반들 역시 일반 국민과 마찬가지로 구차하고 고생스러운 삶을 살았고, 더욱이 일제에 착취당하며 곧 강제징용 및 일본군위안부 등으로 학대당하게 될 백성들의 삶은 애당초 친일파들의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이완용은 현재까지도 한국인 사이에서 매국노의 대명사로 알려져있으며, 그 이름은 중국에까지 알려지기도 했다.

    긍정적 평가

    일단, 그는 조선의 문을 닫은 장본인이고 일본을 끌어들인 것은 맞으나, 같은 친일파 박중양(朴重陽)은 1945년 해방이후 이완용을 '역사의 희생자'라며 변호:15 한데 이어, 하물며 관직을 사퇴하고 도피하는 것은 무책임한 자의 행동:15 일 뿐이다.'라며 이완용이 모든 악역을 자처했다고 변호했다. 그는 '누구라도 이완용과 동일한 경우의 처지가 된다면 이완용 이상의 선처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라며 이완용 등은 단순히 매국노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는 을사조약 때나 경술국치 이후 관직을 내놓았던 일부 양심 인사들, 또한 그들을 존경하던 사람들과 엄청난 논쟁거리가 되었다.

    특히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의 각종 이권 요구를 막아낸 이완용을 서재필은 독립신문 1897년 11월 11일 자 논설을 통해 "이완용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외국에 이권을 넘겨주는 것에 반대했다"면서 "대한의 몇 째 아니 가는 재상"으로 극찬하고 있다[. 이완용과 동시에 과거에 급제했던 서재필은 갑신정변의 주동자로 부인과 젖먹이 아들까지 죽임을 당하고 미국으로 도망가 갖은 고생을 다했었고, 당연히 수구파의 좌장격인 이완용에게 감정이 좋지 않았을 터였음에도 칭찬한 것이다. 물론 이완용이 이후, 서구식 참정권을 주장하는 개화파 계열 독립협회원들을 공격하고 이내 협회내 모든 간부직에서 자진 사퇴하자 둘 사이의 틈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으며, 수구파들을 대동하여 친일 개화파들과 짬짜미해 임금과 백성을 속이고 일본에 나라를 팔자 서재필은 더 큰 증오와 멸시를 보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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