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로고
검색 이미지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땅속의 말똥구리
땅속의 말똥구리23.02.16

역사적으로 측우기는 어떻게 발견된 것일까요?

측우기는 우리나라 조상님들이 발견한 위대한 유산중에 하나인데요. 어떤계기로 이런 위대한 발명품이 창시된 것일까요?

그리고 누가 발명한 것일까요?

55글자 더 채워주세요.
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2.17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측우기 발명자는 장영실이 아니라 문종이라는 새로운 사실이 실록에서 밝혀졌다는 내용이있습니다

    "세자가 가뭄을 근심하여

    구리로 만든 원통형 기구를

    궁중에 설치하고 여기에 고인

    빗물의 푼수를 조사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23년 4월 을미년, 양력으로 따지면 1441년 5월 28일의 기록에 위의 구절이 나옵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세자는 훗날의 문종으로 이듬해의 기록에는 측우기라는 구체적인 용어가 등장합니다

    당시 28세의 나이였던 문종이 정확한 강우량을 측정하기 위해 직접 개발한 기구가 측우기였습니다.

    또한 측우기를 발명하게 된 계기가 과거에는 매년 봄 가뭄에 대한 걱정이 많았습니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볍씨를 직접 뿌리는 직파보다 모내기를 하는 이앙법이 대중화되면서 양력 6월의 강수량이 굉장히 중요했죠. 파종이나 모내기 철인 양력 4~6월에 심각한 가뭄이 시작되면 나라 전체가 기근에 시달리는 일도 많았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왕들이 가뭄을 걱정하는 내용들이 자주 등장하는데요. 가뭄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자책하는 일도 많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예부터 강우량을 중요시했던 우리 민족인 만큼 체계적인 우량 관측을 위한 다양한 시도가 이어져 왔습니다.

    측우기가 쓰이기 이전에는 각 도의 관찰사가 자기가 관할하는 도 내의 군현에서 빗물이 땅 속에 스며든 깊이를 조사하고 수집하여 중앙의 호조에 보고하는 방식을 사용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강우량의 측정법은 땅이 말랐을 때와 젖었을 때에 따라서 땅 속에 스며드는 빗물의 깊이의 차이가 많아 정확한 강우량을 알아내기가 어려웠다고합니다. 그런데 측우기는 그 안에 일정 기간 동안 고인 빗물의 깊이를 재어 그 지역의 비가 온 양을 측정하는 방식이라 이전보다는 정확하게 강우량을 측정할 수 있었고, 비가 온 양을 알아내는 방법도 아주 편리해지게 되었다.

    그 출발점이 된 것이 1440년 직후에 발명된 측우기입니다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세종대왕때 장영실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세계최초의 국가단위 표준화된 기상측정 기구였습니다.

    땅을파서 비를 측정하다가 구리 그릇을 이용하여 비의 양을 측정하는데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측우기는 강우량을 측정하기 위한 우량계의 일종으로 1442년 5월 19일 세종의 명에 따라 당시 세자였던 문종이 설계하고 장영실 등이 제작한 발명품입니다.

    세종실록 세종 23년 4월 29일 기사를 보면 근년 이래로 세자가 가뭄을 근심하여 비가 올 때마다 젖어 들어간 푼수를 땅을 파고 보았었다. 그러나 정확하게 비가 온 푼수를 알지 못했으므로 구리를 부어 그릇을 만들고는 궁중에 두어 빗물이 그릇에 괴인 푼수를 실험하였는데 이제 이 물건이 만일 하늘에서 내렸다면 하필 이 그릇에 내렸겠는가.

    로 기록되어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측우기(測雨器)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 › Article

    측우기는 세종 때 발명되어 사용한 조선시대의 공식적인 우량 측정기구이다. 1440년(세종 22)을 전후하여 발명되어 1442년부터 20세기 초 일제 통감부에 의해 근대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