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거란전쟁 하잖아요 드라마? 강감찬 인물에 대해..
강감찬 장군인데 지금 문신으로 나오거든요
나중에 병사들 이끌고 적들도 잡나요?
지금만 보면 엄청 싸움도 못해 보이는데 어떻게 장군이 됐을가요?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강감찬은 거란이 2차 침입때 공을 세워 현종의 인정을 받고 경관직인 내사시랑 동내사 문하평장사(內史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와 외관직인 서경 유수를 겸임하게 됩니다.
거란이 3차 침입해 올때 강감찬은 상원수가 되어 원수 강민첨 등과 함께 20만 8천 명을 이끌고 나가 곳곳에서 요나라군을 격파하였답니다. 흥화진(興化鎭) 전투에서는 1만 2천여 명의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았다가 적병이 이르자 막았던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는 전술로 혼란에 빠진 요나라군을 크게 무찔렀습니다.
전쟁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뛰어난 지략이 필요합니다. 강감찬의 무예가 얼마나 뛰어났는지는 알수 없으나 그의 지략은 뛰어나 거란을 대파할 수 있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강감찬과 같은 경우에는 문신입니다.
문신 출신이 총사령관이 되는 경우가 고려에는 상당수 있었고
문신이 군의 최고 책임자 등을 역임하기도 하는 등 하였기에
무술실력과는 별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강감찬은 고려의 문관입니다. 993년(성종 3년)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예부시랑 한림학사를 거쳐 평장사가 되었습니다. 강조정변으로 1010년(현종 1년) 요나라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왔을 때에는 현종을 몽진하도록 설득하여 끝까지 싸우도록 주장하였습니다. 작전상 후퇴를 주장한 것입니다. 1018년에는 경관직인 내사시랑 동내사 문화평장사와 외관직인 서경유수를 겸임하였습니다. 서경유수는 단순한 지방관리가 아니라 군사작전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현종이 입조하지 않는 것과 강동 6주 반환을 촉구하며 거란은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3차 침입을 해오자 강강찬은 귀주에서 적을 크게 무찔러 10만 대군 중 살아 돌아간 이는2천 7백여명에 불과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강감찬은 문신이였지만 과거 무신과 같이 거란 전쟁 이전에도 전쟁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문신이고 나이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기간동안에 장군으로서 임명 되기도 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강감찬 장군은 983년(성종 3) 과거로 문과 장원 급제하여 예부시랑으로 관리 생활을 시작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거란의 2차 침입시 현종에게 피난을 건의하여 사직을 보호한 공으로 문하평장사와 서경 유수를 겸하게 되었으며, 3차 침입시 상원수로 군사 20만을 이끌고 1019년 귀주대첩로 거란을 격퇴하였습니다.
강감찬 장군이 장군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게된 배경은 20만군을 '상원수'로서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장수라는 측면에서 장군이라는 칭호로 불릴 수 있습니다. 즉 임시직 '상원수'이기에 직접 전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지휘권을 행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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