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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침팬지184
외로운침팬지18423.09.30

근대사공부하다가 아관파천을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근대사공부하다가 고종이 아관파천을 했다고 하던데 아관파천을 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혹시 아시는 전문가님 답변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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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10.01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 이후 조선은 청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 때 일본은 조선을 자국의 발 아래 두려고 벼르고있던 상황에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고, 조선은 청에 원군을 파병하였습니다. 이때 일본은 톈진 조약을 확대 해서 조선에 원군을 파병합니다. 하지만 동학농민운동은 정부와 전주화약을 맺고 자진 해산하였으며, 조선은 원군의 역할이 없어졌기 때문에 철수를 요구했습니다. 청군은 물러났지만 일본군은 조선의 개혁 추진을 핑계로 물러나지 않고, 경복궁을 점령하여 간섭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청일 전쟁이 일어나게되었고 이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면서 일본은 청으로부터 요동반도를 할양받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커진 일본을 견제하기위해 프랑스, 독일, 러시아 3개국이 일본에게 압박을 가하여 요동반도를 반환케 합니다. 이를 3국간섭이라고 하지요. 명성황후는 러시아의 힘이 강대함을 보고, 친러 정책을 적극적으로 펴기 시작했고 이에 위기를 느낀 일본이 불법으로 경복궁을 침략,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함으로써 을미사변이 일어납니다. 이 때 생명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피신)함으로써 이른바 아관파천(1896년)하게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해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확보하고 청나라로부터 랴오둥반도 등지를 할양받았으나 1895년 5월 일본의 독주를 우려한 열강들, 즉 러시아가 주동하고 프랑스, 독일이 연합한 삼국간섭으로 일본은 랴오둥반도를 청나라에 반환, 삼국간섭 이후 러시아의 영향력을 확인한 조선 측에서 러시아에 접근합니다.

    그동안 친일세력에 눌려있던 명성황후 척족 세력과 함께 유럽, 미국 공관과 밀접한 접촉을 가지며 친미, 친러 경향을 보이던 정동파 인사들이 득세, 러시아 공사 베베르 역시 미국공사와 재한 미국인을 포섭하고 명성황후 세력에 접근해 친러 정책 실시를 권유합니다.

    이에 친일 세력은 급격히 세력을 상실하며 김홍집 내각이 붕괴, 그 후 일본공사 이노우에의 매수 정책에 따라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지만 명성황후 세력과 친미, 친러파가 요직을 장악, 내각은 일본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던 개혁 사업을 폐지하고 친일파를 축출합니다.

    또 일본에 의해 육성된 훈련대마저 해산당할 위기에 처하자 신임 일본공사 미우라는 1895년 10월 8일 일본인 낭인과 훈련대를 경복궁에 침입시켜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그 결과 세력을 만회한 일본은 친일 내각을 성립시켜 단발령을 실시, 급진적인 개혁 사업을 추진합니다. 그러나 왕비 시해와 단발령 강행은 전국에 걸친 의병 봉기를 초래하게 되며 전국에 걸쳐 의병이 일어나자 김홍집 내각은 지방의 진위대를 이용해 의병을 진압하려 하나 기대에 못미치고, 중앙의 친위대 병력까지 동원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수도 경비에 공백이 생겼고, 이 기회를 틈타 친러파 측은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고자 논의하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아관파천은 조선의 정권을 장악한 친일내각에 대한 반발로 초래된 사건이었습니다. 을미사변과 단발령 이래 전국적 반발이 초래된 것을 틈타 신변 위협을 느끼던 고종의 요청에 러시아공사관 측이 호응하였고 이재순 이범진 이완용 윤용 등이 계획을 세워 실행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