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들은 왜 그리 차를 많이 마시는건가요?
영국인들이 하루에 마시는 차의 양은 약 1억6천만 잔에 이를 정도이다. 하지만 영국에 차문화가 대중화 된 것은 3세기도 채 안 된다. 중국의 차가 처음 영국인에게 소개되었을 때 영국인에게 차는 매우 생소한 것이었지만, 그 당시 중국 문화에 대한 동경으로 중국차를 마신다는 것은 영국인들에게 고급문화의 향연이자 부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18세기 초에는 왕실과 상류층을 중심으로 홍차의 소비가 급증하게 되고, 18세기 중반에는 거의 모든 가정의 아침식탁에 차가 올라오게 된다. 19세기에는 차를 마시는 습관이 널리 퍼져 ‘애프터눈 티’ 문화가 정착되었다.
이렇듯 차의 소비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되면서 중국에서 수입하는 차만으로는 그 수요를 따라갈 수 없게 되자, 영국은 식민지에서 직접 중국 차나무 재배를 시도하게 된다. 이에 인도, 자바, 실론 등지에서 여러 번 시도하였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다르질링(다즐링, Darjeeling: 인도 동북쪽 서벵골 주 북부의 도시) 지역에서만 유일하게 차 재배를 성공하게 된다.
다르질링 홍차는 그 맥을 이어 현재에도 세계 어디에서나 사랑받고 있다. 그 후 영국인들은 인도의 아쌈, 실론(스리랑카) 등지에서도 차 재배를 성공하게 된다.
영국인의 차에 대한 사랑은 중국과 영국의 역사적인 전쟁인 아편전쟁을 발발시키게 된다. 당시 중국은 모든 물건이 풍족한 반면 영국은 중국으로부터 수입해야 하는 물건들이 많았기 때문에 항상 무역불균형이 초래되었다.
특히 차는 중국이 아니면 수입할 곳이 없어 차에 지불하는 은(銀)은 국가의 재정을 흔들 정도였고 영국은 이에 대한 대책으로 식민지였던 인도로부터 아편을 가져다 중국에 팔기 시작하였다. 당시 중국에도 아편은 있었지만 마시는 약용으로만 사용되었고, 영국은 담배와 같이 흡입할 수 있도록 간편하게 만들어 판매하였다.
아편은 중독성이 있기 때문에 그 폐해가 날로 심각해져 청나라 정부가 재배ㆍ수입과 흡입을 금지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인 밀수입은 막을 수가 없었다. 아편으로 인해 막대한 중국의 은이 이제는 영국으로 유출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1839년 중국은 영국 상인들의 아편을 몰수하여 소각하게 되고, 이에 반발한 영국이 청나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1840년 아편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1842년 아편전쟁에 승리한 영국은 차무역을 자유화시켰고, 인도와 실론 지역에서의 차 재배가 성공하면서 영국의 차소비는 더욱 확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