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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일러스
사일러스23.09.18

조선시대 양자는 어떤 기준으로 뽑았나요?

집안의 대를 이을 후손이 없으면, 양자를 들였다고 하는데, 양자를 아무나 고르지는 않았을테고, 어떤 기준으로 양자를 들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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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9.18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도 양자제도는 가계계승을 최우선 목적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아들을 두지 못한 양반이 양자를 필수적으로 선택한 사실은 양자가 가계계승 목적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양자를 통한 가계 계승이 자리를 잡으면서 여러 현상이 나타났다. 수양자와 시양자는 왕실에서 인정한 전형적인 양자의 방식이었습니다. 수양자는 양부와 그의 형제 사이에 자손이 없는 경우에 이성이라 하더라도 3세 이전에 삼은 양자로 친자 대우를 받았습니다. 반면 시양자는 가계를 상속할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3세 이후에 입양된 자를 의미하며 성을 굳이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수양자는 가계계승과 재산상속을 받을 수 있었지만, 시양자는 가계계승과 직결되지 않아서 아동을 위한 복지와 노동력을 취할 목적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아동구휼과 노후봉양, 사후봉사 등 양자와 양부모가 현실적으로 다양한 사적인 정을 실현시키는 통로로서 작용하였습니다.

    아들 항렬에 적합한 대상을 찾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손자 항렬에서 사람을 입양시키는 경우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경우 아들 항렬에서 이미 죽은 사람의 이름으로 입양하는 것을 백골양자라고 불렀습니다. 조선 후기 들어서 결과적으로 양자를 교환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양자교환은 양자의 범위와 폭을 가늠할 수 있으며, 조선 후기에 양반사회에서 양자가 보편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단초를 제공하였다고 합니다.

    근현대 들어서는 유기아에 대한 인도주의적 대우, 불임문제의 대안이라는 측면이 강조되면서 입양이 권고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