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발해 건국이 고구려 멸망 후 유민 부흥과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으며
발해의 지배계급이 고구려 출신이었던 것,
그리고 발해가 멸망되고 발해유민이 고려에 흡수되었다는 것
이런 것이 같은 민족의 국가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동북아역사재단의 자료로 근거가 되는 문단입니다.
발해가 한국사인 이유는 우선 발해의 건국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발해 건국은 고구려 멸망 후 유민부흥과 그 맥을 같이 한다. 특히 요동(遼東) 지역은 7세기 이후 당나라의 패권정치에 대한 주변 민족 저항의 구심점이었다. 발해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은 영주(營州 : 현재 중국의 조양시) 지역을 중심으로 고구려유민을 결집하여 동모산(東牟山 : 현재 중국의 돈화)으로 이동하여 진(震/振)의 건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진국왕에 올랐다. 이것이 바로 발해가 어느 나라에도 종속되지 않았던 독립국가임을 천명한 것이다.
그러한 점은 발해가 사용한 독자적인 연호와 시호, 하늘의 자손임과 발해왕이 황제임을 강조하였던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고왕은 외교적으로도 주변국과의 교류를 통하여 국가의 기틀을 다져 나갔다. 신라에게서는 발해 건국에 걸맞는 신라 관직을 받았으며, 《삼국사기》를 통해 보면, 신라 원성왕(元聖王)과 헌덕왕(憲德王) 때 북국(北國)인 발해에 사신을 파견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우리는 발해와 신라를 한국사 속에 남북국사로 설정하고 있는데, 위 기록은 바로 그 원천근거이다. 《고려사》에는 926년 발해 멸망을 전후하여 근 2백 여 년 간의 발해유민의 고려망명 기록이 실려 있다. 발해와 고려의 친연성이 없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후 남북국사 인식은 조선시대 실학자인 유득공(柳得恭)에 의해 이론적 틀을 갖추고 한국사의 당당한 주체로서 자리매김하였고 발해가 신라와 함께 한국사의 주체임을 명확히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