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열사의 삶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유관순 열사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서대문 형무소에 끌려갔고, 결국 고문에 못이겨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만세운동을 하다가 잡히신걸로 알고 있습니다.
근데 당시에 많은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했었던걸로 아는데 왜 유독 유관순 열사가 유명한 건가요?
안녕하세요. 권태형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많은 학생 독립운동가 중 그 치적이 상당하고, 상징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학생들의 시위가 극심해지자 일제는 3월 10일 전국적으로 휴교령을 내렸고 학교로 갈 수 없게 된 유관순은 3월 13일 기차를 통해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때 고향으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친구들이 기차소리를 듣고 ‘동전 한 푼, 동전 한 푼’ 하는 소리로 들린다고 하자 유관순은 ‘대한 독립, 대한 독립’ 하는 소리로 들린다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합니다. 고향에 돌아온 유관순은 부친 유중권과 조인원 등 마을 어른들에게 서울에서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고 숨겨온 독립선언서를 내놓으며 병천 시장에서의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상의하였을 정도로 이화 학교 에서만 만세 운동을 한것이 아니라 고향에 와서도 독립 만세 운동을 실행 할 정도로 애국심이 유독 강했기 때문 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에 태어났습니다. 1916년 충남 공주시에서 선교활동하던 미국인 감리교회 선교사 사애리시 부인의 추천으로 이화학당 보통과 3년 장학생으로 편입하고, 1919년 고등부로 진학하였습니다.
그녀는 3월 1일과 5일 만세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나 총독부이 휴교령으로 천안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녀는 4월 1일 천안 아우내에서 만세 시위로 체포되어 공주지방법에서 주동자로 지목되어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며,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으로 감형되었으나 상고를 포기하였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경성복심법원 재판 당시 일제의 한국점령을 규탄 항의하면서 조선총독부 법률은 부당하기에 일본 법관에 의한 재판을 받는 것을 부당함을 역설하였습니다. 게다가 1920년 3.1운동 1주년을 기념하여 옥중에서 만세를 주동합니다. 그러자 일제의 심한 고문이 이어지고 결국 1920년 9월 28일 방광파열로 순국하였습니다.
그녀는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3.1운동을 주도하고, 법정과 감옥에서도 일제의 침략과 지배에 대해 항거하다 고문으로 순국하였기 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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