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영조는 당쟁의 폐해가 국가에 미치는 해악을 실감하였고 세제책립과 대리청정의 시비로 노 소론간의 분쟁이 격심해 신임사화라는 당화를 몰고 온 폐해를 직접 경험한 장본인입니다. 따라서 탕평책은 이것을 반성하는 입장에서 나온 정치이념이자 예방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대립이 극심하였고 1788년(정조 12)에는 채제공을 비롯한 남인세력을 본격적으로 등용해 노론과 남인의 보합을 도모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에 호응한 영남 남인들이 1792년에 그간 노론의 우위 아래 금기시되어온 임오의리문제를 제기해 노론을 크게 당혹시키는 형세 변동이 일어났습니다. 노론 내부의 시파와 벽파의 분열은 이러한 형세변화를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이와같이 정조는 조제 보합의 인재등용을 골자를 계승하면서 사대부의 의리와 명절을 중시해온 청류들을 대폭 기용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노 소론 중에 온건론자들이 함께 지지하는 완론 탕평을 이끌어온 영조가 파당간의 병진을 기본 바탕으로 한 것과는 차이를 보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한 파당의 대립된 갈등을 근절하지 못했기에 후대에 세도정치의 빌미를 마련해 준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