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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운찬갈매기134
기운찬갈매기13423.03.02

조선시대의 신문고는 잘 활용이 되었나요?

오늘날에도 신문고가 있는데

조선시대 태종 때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대궐밖에 설치 했다는 신문고는 실제로 백성들에게 활용도가 높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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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부드러운사슴344입니다.

    실제로 신문고는 그림의 떡이었다고합니다. 신문고를 치기위한 절차란 첫째 거주지 소재의 관찰사에 고하는 것이었고 여기서 일이 해결되지 않을 때 사헌부에 다시 고발을 하고 그래도 해결되지 않으면 신문고를 치게 했으니 이런 절차를 제대로 밟을 줄 아는 백성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 안녕하세요. 영원한통입니다.

    조선초기에 설치된 신문고는 실제 궐안에 위치하여 백성들의 접근이 제한적이었다고 합니다.

    소통정치를 상징하는 역활에 국한되었던것ㅈ같네요.


  • 안녕하세요. 슬기로운생활입니다.

    조선시대의 신문고 제도를 살펴보면 형식적으로는 궁핍한 백성들을 위한 법률구조의 기능이 있었다는것을 알수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말그대로 형식적인 의미일뿐 그 내면을 살펴본다면 다분히 정치적인

    계산이 있었다는것을 알수있는데요

    신문고가 처음 설치된것은 태종 1년때입니다

    서울과 지방에서 억울한 일이 있어도 말할 데가 없는 백성을 위하여 신문고를 설치했던 것입니다

    힘없고 가난한 백성에게는 너무나 신나는 일이었겠죠 더군다나 당시에는 하늘과 같았던 왕이 직접

    사건을 해결해준다고 하니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래서 억울한 일이 있는 백성들은 신문고를 치러 물어물어 한양으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한양까지 갔더니 신문고를 지키는 관리는 절차를 밟아서 치라고 추상같은 호령을 내리는게

    아닙니까 그저 신문고를 치기만 하면 억울한 일을 나랏님이 들어주신다고 알고있던 백성들에게는

    어이없는 소리가 아닐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당시의 절차란 첫번째로 소재지의 관사에 고하는것이었고 여기서 일이 해결되지 않을때

    사헌부에 다시 고발하고 여기서도 해결되지 않을때 신문고를 치게 했으니 이런 절차를 제대로 밟을

    백성이 몇명이나 있겠습니다

    이러한 절차없이 신문고를 칠수있는 일은 나라의 역모를 알리는 일밖에는 없었습니다

    역모란 나라의 시급한 사건이니 바로 칠수있다는 것이었는데 사실 태종이 신문고를 설치한 속마음은

    이런 이유였습니다


    신문고 제도를 만들게된 사회적 배경

    태종 이방원은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인물입니다

    태종은 이문제를 두고 마음에 걸렸죠 그래서 태종이 즉위 초기에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이 역모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혹시 신하들이 반역을 꾀하는 마음을 품지 않을까라는 것과 백성들이 흠있는 왕이라고

    보면 어떡하나.......

    태종은 민심을 어루만지고 역모를 미리 막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끝에 나온 방안이 바로 신문고

    입니다


    백성을 위한다는 명분과 역모를 사전에 차단할수있는 일석이조의 정치적 효과를 이용한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