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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공주파리더
칠공주파리더24.03.31

조선시대 때 여진정벌은 혹시 뒤에 후폭풍이 없었나요?

고려시대 때에는 윤관의 9성 축조는 실패로 돌아갔잖아요? 그것도 여진의 많은 견제로 그 영토를 지키지 못하겠다는 판단 하에서요. 그런데 조선의 4군 6진은 정벌 후 여진족의 심한 견제가 없었나요? 아니면 있었지만 당시 여진족의 세력이 약했거나 아니면 세종의 지휘아래 모두 물리친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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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두만강 유역의 6진은 조선 말까지 건실하게 잘 유지되었으며, 이는 이 지역이 조선 건국자 태조 이성계의 근거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태조 이성계의 4대조를 비롯한 왕실의 종조들이 모두 이곳에 누워있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쉽게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4군의 경우, 4군 설치 이후에도 여진족이 계속 대규모로 침입해오면서, 철폐가 논의되어, 단종 3년(1455년)에 이르러 여연, 무창, 자성, 우예의 4군이 철폐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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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연히 많은 여진족과의 전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김종서 장군의 뛰어난 지휘력과

    조선군의 용맹함으로 적의 예기를 꺽어 버렸고

    그곳에 백성들을 이주 시켜 살게 하면서 영토를

    확장 할 수 있었습니다. 세종의 전폭적인 지원도

    한 몫했습니다. 제 답변이 도움이 되셨으면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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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은 여진족에게 회유책과 강경책을 병행하는 교린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조선 4대 세종의 4군6진의 개척은 강경책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회유책으로는 경성과 경원에 무역소를 두어 반농반수렵활동을 하는 여진족들이 자급자족할 수 없던 종이 면포 등의 여러 물품들을 모피 등과 교환하도록 하였고 여진족들의 조공과 귀화를 받아들였으며 여진 추장들에게 천호 만호의 조선 정부의 명예직을 주었습니다. 세종은 백두산 주변의 4군과 두만강 유역의 6진의 개척으로 국경을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확장했으나 요동 등의 옛 고토를 회복하지는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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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여진정벌은 고려의 동북면에 거주하던 동여진을 토벌한 전쟁입니다.

    임간과 윤관 등이 군사를 이끌고 여진을 정벌하였다가 실패하고 화친을 맺고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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