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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무
수리무23.12.24

광해군은 왜 인목대비를 폐출했나요?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유배를 보낸 후 죽이고 인목대비도 폐출한 후 서궁에 유폐

시켰는데 영창대군은 이해가 되는데

효를 근본으로 하는 나라에서 굳이 인목대비를 그럴 필요가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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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5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12.25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의 계모였다고 합니다.

    광해군 즉위 후 정권을 잡은 대북파는 1613년 김제남을 모반죄로 죽이고 영창대군을 강화에 유폐시켰다가 살해했습니다.
    인목대비도 1618년 대비의 자리에서 쫓겨나 서궁에 유폐당했다가 인조반정 후 대왕 대비가 되어 인경궁에 기거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해군은 결국 1623년(광해군 15년), 인조반정으로 강제로 왕위에서 끌려나왔고 인목대비가 유폐된 경운궁 석어당 앞에 무릎꿇리고 인목대비를 폐위시킵니다.

    1608년 소북의 유영경은 선조의 마음이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에게 있는 것을 알고,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5세 된 어린아이를 왕으로 세우고 섭정을 하는 것이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한 인목왕후는 광해군에게 보위를 넘깁니다. 그러나 유영경은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이유로 이이첨, 정인홍, 이산해 등의 공격을 받고 몰락합니다.

    1614년에는 일곱 명의 서자들이 강도가 되어 상인을 약탈하는 칠서의 변이 발생했는데, 이때 이이첨 일파는 사건을 확대시켜 이들이 김제남과 연합하여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자백을 얻어내게 됩이다. 이를 근거로 김제남은 처형당하고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됐다가 사형당한다. 그 뒤 역적의 딸이며 역적의 어머니인 인목왕후가 대비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여론이 나오면서 1617년부터 인목대비의 폐비론이 대두됩니다. 이후 경연과 정청에서 인목대비 폐비론의 가부를 논논하게 됩니다. 이때 이이첨, 허균 등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폐비 여론을 주도하였습니다.

    칠서의 변과 영창대군 추대 사건을 빌미로 북인은 인목왕후의 폐비를 주장했고, 광해군과 북인 정권은 서인과 남인에 의해 패륜아로 몰려 폐위되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제15대 왕인 광해군은 임진왜란 이후 부국강병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하지만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습니다. 광해군은 왕위계승 과정에서 갈등을 빚은 영창대군을 대북파들의 강력한 요청으로 1613년 서인으로 삼았고 1618년에는 이이첨 등의 폐모론에 따라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켰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행위는 서인들의 반발을 불러왔고 결국 서인 주도의 반정으로 폐위당하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정석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해군(왕건)이 인목대비를 폐출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과 이야기가 있지만, 정확한 사실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출한 이유가 정치적인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신라와 후백제의 후손이자 고려의 존립을 위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왕권의 상징이었던 인목대비를 폐출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광해군이 천도를 선포한 후에는 불교적인 영향을 받아 왕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 인목대비를 폐출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설과 이야기들은 역사적인 사실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해군과 같은 경우에는 영창대군과 인목대비를 제거하느 등

    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정적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