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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결국 1623년(광해군 15년), 인조반정으로 강제로 왕위에서 끌려나왔고 인목대비가 유폐된 경운궁 석어당 앞에 무릎꿇리고 인목대비를 폐위시킵니다.
1608년 소북의 유영경은 선조의 마음이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에게 있는 것을 알고,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5세 된 어린아이를 왕으로 세우고 섭정을 하는 것이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한 인목왕후는 광해군에게 보위를 넘깁니다. 그러나 유영경은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이유로 이이첨, 정인홍, 이산해 등의 공격을 받고 몰락합니다.
1614년에는 일곱 명의 서자들이 강도가 되어 상인을 약탈하는 칠서의 변이 발생했는데, 이때 이이첨 일파는 사건을 확대시켜 이들이 김제남과 연합하여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자백을 얻어내게 됩이다. 이를 근거로 김제남은 처형당하고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됐다가 사형당한다. 그 뒤 역적의 딸이며 역적의 어머니인 인목왕후가 대비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여론이 나오면서 1617년부터 인목대비의 폐비론이 대두됩니다. 이후 경연과 정청에서 인목대비 폐비론의 가부를 논논하게 됩니다. 이때 이이첨, 허균 등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폐비 여론을 주도하였습니다.
칠서의 변과 영창대군 추대 사건을 빌미로 북인은 인목왕후의 폐비를 주장했고, 광해군과 북인 정권은 서인과 남인에 의해 패륜아로 몰려 폐위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