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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한호저172
까칠한호저17223.05.15

백제는 진흥왕의 배신으로 한강을 잃은 것인가요?

백제는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점차 쇠퇴하였습니다. 그런데 신라 진흥왕 시기에 백제는 진흥왕의 배신으로 한강 하류를 빼앗겼다고 하던데 맞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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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15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진흥왕 12년(551) 신라와 백제는 한강유역의 공격에 나서게 된다. 신라는 거칠부 등 여덟 장수를 보내 竹嶺 이북 高峴 이내의 10개 군현을 탈취하였고, 백제는 평양을 격파하였는데,226) 고현이 어디인지는 불확실하나 죽령 이북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이 때에 신라가 획득한 지역은 한강 상류지역의 고구려 영토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는 이 당시에 건립되었다고 보이는<丹陽 赤城碑>의 위치로 보아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리고 백제가 공취한 지역에 대해≪일본서기≫欽明天皇 12년조에 漢城·平壤 등의 6개 군을 취하였다고 했으니 이는 한강 하류지역으로 현재의 서울을 포함한 지역일 것이다. 이로써 백제는 지난날 고구려에게 빼앗겼던 한강유역의 옛땅을 되찾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2년 뒤 신라는 백제의 동북지역을 공격하여 이 지역에 新州를 설치하고 각간 武力을 군주로 임명하였다. 이는 백제의 입장에서는 매우 커다란 충격이었고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반대로 신라의 입장에서는 고대해 마지않던 숙원사업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신라로서는 한강유역의 비옥한 토지를 점령함으로써 많은 人的·物的 자원을 확보할 수 있었고, 중국과의 교통로를 확보하여 국제관계에 있어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을 뿐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를 분리시킴으로 인해 삼국통일의 발판을 마련한 획기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부터 신라와 백제의 대립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데, 한강 하류지역을 빼앗긴 직후에 성왕은 자신의 딸을 진흥왕의 小妃로 보내고 있는데, 이는 일단 신라가 한강 하류지역을 편입한 것을 용인하는 듯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경계심을 늦추게 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신라에 대한 본격적인 침입을 계획하고 있었다. 다음해인 554년 7월 성왕은 大加耶軍 및 왜와 합세하여 신라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에 나서게 된다. 이 때의 싸움터가 지금의 沃川 부근인 管山城이었는데, 처음에는 백제가 유리한 듯 하였으나 적진 깊숙히 진격한 아들 餘昌(威德王)을 위문하러 성왕이 친히 步騎 50을 이끌고 밤에 가다가 狗川에서 신라의 복병에 의해 살해되고 만다. 이를 틈타 신라의 대반격이 시작되어 백제군을 크게 격파하였는데 당시 백제의 군사 29,600명이 전사하였다고 한다.227)

    새로이 확보한 한강유역을 통치하기 위해 신라는 이 지역에 신주를 설치하고 진흥왕 16년(555)에는 왕이 친히 北漢山에 巡幸하여 疆域을 확정지었는데228), 현재 서울에 있는 진흥왕의<북한산비>는 이 때에 세운 것이다. 진흥왕 18년에는 신주를 폐하고 北漢山州를 두었으며 같은 왕 29년에는 북한산주를 폐하고 南川州(利川)를 설치하였다가 진평왕 16년(594)에는 남천주를 폐하고 다시 북한산주를 두었다. 이렇게 자주 州를 폐하고 설치한 것은 사실은 주의 治所를 옮긴 데 지나지 않는데, 이는 신라가 이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매우 고심하고 있었다는 증거로 생각된다. 또 한강의 상류지역에는 고구려의 國原城 자리에 小京을 설치하여 國原小京이라 불렀는데, 이 지역을 정치·문화·군사의 중심지로 개척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목표를 더욱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하여 진흥왕 19년에는 중앙귀족의 자제와 6부의 豪民을 국원소경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가야에서 귀순한 樂聖 우륵도 이런 사정으로 국원성에 머물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신라로서는 국원을 실질적인 한강유역의 중심지로 육성하고자 했던 것이며, 이는 고구려가 이 지역을 남진정책의 기지로 삼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라는 북진정책의 기지로 삼으려 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南陽灣에는 党項城이란 요새를 쌓아 이를 거점으로 진흥왕 25년 이래 거의 매년 중국의 陳과 北齊 두 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관계를 공고히 하였다. 신라의 삼국통일이 외교의 성공에 크게 힘입었던 것을 생각할 때 한강유역의 점령이야말로 통일사업의 큰 기반이 되었다고 할 것이다.

    출처: 우리역사넷 신편한국사 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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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라와의 동맹은 언젠가는 깨질 운명이었고 누가 먼저 행동에 나서느냐가 중요했습니다.

    백제도 그걸 알고있었지만 내부적인 폐단이 많이 있었기에 신라보다 한발 늦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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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5세기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백제 개로왕이 죽고 한강유역을 빼앗기고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하게 됩니다. 이로인해 백제와 신라는 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대항합니다. 그러다 6세기 백제 성왕과 신라 진흥왕이 연합해 한강유역을 되찾습니다. 백제는 한강 하류를 신라는 한강 상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진흥왕이 약속을 깨고 한강 하류를 공격해 점령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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