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초기 정한론은 일본의 부국강병론적 군국주의자들에게서 등장합니다.
표면적으로 메이지 유신 이후 쓰시마섬을 개입시켜 조선에 대해 왕정복고를 한 신정부의 발족을 통고하고 개국을 강요하는 국교 교섭을 시도, 당시 흥선대원군의 집권 아래 쇄국정책과 척왜정책을 지향하던 조선 정부는 외교문서가 종전과 달리 고종을 격하는 등 당시 외교 관례에 어긋난다며 개수를 요구, 사신의 접견을 거부하는 등 국교 교섭에 난항이 거듭되자 이를 계기로 일본 내에서 정한론이 수면 위로 부상합니다.
1870년 사다 하쿠보가 조선을 방문 후 일본으로 돌아가 강경하고도 구체적인 정한론의 건백서를 제출하는 등 정한론이 유력하게 대두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