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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3.30

명성황후가 정치적인 야망이 꽤 많았다고 하는데 어떤 인물이었나요?

명성황후가 정치적인 야망이 꽤 많았다고 하는데 어떤 인물이었나요?

흥선대원군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그러다 결국 시해되시는 좋지 않은 일을

겪으셨는데.. 명성황후께서는 어떤 성향의 인물이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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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11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명성황후는 고종의 왕비였으며, 순종의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일명 민비라고도 불리죠. 민비는 여자이면서 학문에 뜻을 두고, 상당한 여걸이었다고 합니다. 여자의 몸으로 정사를 돌보고, 시아버지와 대립하는것은 여느 여자들 같으면 못 할 일 아닙니까?

    명성황후는 시아버지인 흥성대원군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서양의문물을 받아 나라를 발전시키자하는 반면에 흥성대원군은 안된다 서양의 문물을 받으면 나라가 망한다 스스로 발전하자라고 서로의 의견대립으로 흥성대원군과 명성황후는 사이가 좋지않습니다

    쇄국정치를 고집하던 대원군이 물러나고 조선의 문물개방은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습니다. 외국을 통해 유입이 된 새로운 사상과 문물은 조선이 새로운 시대에 눈을 뜨게 하는 반면에 수구세력들의 불만은 늘어나고 일본상인들의 농간으로 백성들의 반일감정은 고조되었습니다.

    결국 별기군 특별우대에 반발하여 무위영의 군사들은 난을 일으켜 민씨척족과 황후의 처형을 요구하는 사건인 임오군란이 일어나 대원군이 다시 등장을 하게 되고 황후는 변장을 한채 피신을 하여 가까스로 목숨을 구합니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다시 정국의 중심에 대원군이 등장을 하고 큰 위협을 느낀 조정의 기득권층은 청국의 조정을 요청하였습니다.

    청국은 종주국으로써 속장을 보호해야한다는 명분으로 일본에 빼앗긴 조선의 기득권을 되찾으려 군사를 이끌고 들어와 내정을 간섭하기 시작했으며 이때 대원군을 납치해 청국으로 호송을 하고 다시 황후는 궁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 후 10여 년간 일본과 청나라의 각축전은 청일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으나 이미 노쇠한 청나라는 일본의 상대가 되지못했고 청일전쟁 후 일본은 시모노세끼 조약과 갑오경장을 요구하여 조선의 지배기반을 확고하게 구축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불란서, 독일을 회유하여 일본의 기득권 탈취를 골자로 하는"삼국간섭"을 성사 시킨 명성황후에 의해 일본은 조선을 다시 잃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지요.

    결국 일본은 대세를 뒤집기 위해 "여우사냥" 이라는 작전명 아래 황후의 암살계획을 수립하고 1895년 10월 8일 사무라이 다카하시 겐지의 칼에 의해 명성황후는 일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 대나무
    대나무23.03.30

    지금까지 명성황후가 정치적 야망이 많은 분이라고 알려진 것은

    일제의 역사 왜곡 때문입니다.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역사를 조작한 것입니다.

    내부로부터 보수유생, 구식군대, 급진개화파, 동학농민군의 도전과

    밖으로 청나라의 내정간섭으로 국정이 표류할 때 기지를 발휘하여 사태를 일단

    수습하지만 일제의 입장에서 조선 지배를 위한 전략에 명성황후가 걸림돌입니다.

    그래서 일제의 공권력이 경복궁을 습격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합니다.

    그렇게 사건을 벌여 놓고 일제는 조선을 망친 ‘궁중의 암탉’, ‘중세의 야만왕조’인

    조선궁중의 암투에서 빚어진 것으로 호도하였습니다.

    하지만 명성황후를 직접 대면했던 서양 외교관과 선교사들의 부인들의 기록은

    일제의 주장과는 달리 명성황후는 동양의 고전에 밝았고, 서양의 종교와 풍속,

    정치와 의회제도, 여성의 교육과 지위 등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명성황후는 유가적 소양과 서양의 문물에 대한 이래를 바탕으로 자신과 왕실,

    군주와 국가의 활로를 추구하던 국모이자, 근대형의 여성정치가로 재평가되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병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 을미사변으로 인한 잔혹한 최후와 후세 대중매체의 미화가 있지만 실제로 명성황후는 당대는 물론 현대에도 충분히 비판받을만한 인물입니다. 주요 비판점을 살펴보면



    1. 외척 발호


    명성황후의 친인척들이 관직에 등용되면서 부정부패가 야기되었고 특히 임오군란의 주요 원인은 명성황후의 오빠인 민겸호가 군인들에게 지급해야할 쌀을 횡령하고 오히려 항의하는 군인들을 처형시키려 하자 터진 사건입니다. 동학농민운동이 터진 고부군수 조병갑 등이 한 지방 수령의 수탈 원인도 중앙의 부정부패로 일어나게 된 이유로 꼽힙니다.



    2. 무당 신봉


    무당 신앙을 신봉해 자주 푸닥거리를 열고 진령군이란 무당에게 과도할 정도의 재물을 내렸다고 합니다. 오늘날로 치자면 사이비종교에 빠져 국고를 함부로 탕진한 것이지요.



    3. 외세 허용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때는 청군에게 도움을,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이후에는 러시아와 손잡는 행보를 보였습니다. 또 이들에게 광산 채굴권이나 철도 부설권, 산림 채벌권 등 경제적 이권을 내주었지요.




    실제로 멀쩡히 궁궐 안에서 대례복으로 갈아입고 조선의 국모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실상은 그냥 속옷 차림으로 도망치려다가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열여섯 어린 나이에 왕비로 뽑혀 궁중에

    들어온 민비는 권력의 욕망에 눈뜨면서

    정치적 수완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가까운 친척이 없는 민비는 먼 친척들을

    끌어 모았다. 민승호(이판.대제학), 민겸호(병.이판), 민규호(우의정), 민치구(공판), 민치상(예.형.병판) 등 일족이 민비의 비호 아래

    차차 조정에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성년을 지나 왕권을 행사할 만한 나이가 된

    고종은 민비의 손안에 있었다.

    민비는 고종을 휘어잡고 대원군의

    10년 철권정치에 불만이 많은 유림들을

    부추겨 섭정중단과 왕권반환 여론을 일으켰다.


  •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명성황후는 1851년(철종 2)에 경기도 여주에서 부친 민치록과 모친 한창부부인 이씨 사이에 태어났다. 8세 때 부친이 타계한 뒤, 어머니와 함께 서울의 감고당(感古堂)에 와서 살았다. 감고당은 인현왕후의 친정집이었습니다.

    1863년(철종 14) 철종이 타계하자, 조대비의 명에 의해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이명복(李命福)이 국왕으로 옹립되었다. 3년 뒤인 1866년 흥선대원군과 부대부인 민씨의 역할에 의해 16세 때 왕비로 간택되었습니다.

    고종 즉위 이후 10년 동안은 어린 국왕을 대신하여 흥선대원군의 섭정이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년이 되면서 직접 정사를 보고자 하는 고종의 욕망과 이를 지지하는 척족 인물들과 재야의 여론에 의해 흥선대원군이 하야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고종과 왕비는 개화정책을 추구하였으나, 안에서는 보수유생, 구식군대, 급진개화파, 동학농민군의 도전에 직면하였고, 밖으로는 청국의 강화된 내정간섭으로 국정이 표류하였습니다.

    이런 혼란 속에 명성황후는 임오군란 당시 궁중을 탈출했다가 환궁하였고, 갑신정변 당시는 기지를 발휘하여 거사를 무위에 그치게 하는데 일조하였습니다.

    이후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틈타 일본이 무단으로 조선에 파병하여 경복궁을 침략, 조선 조정을 장악하면서 고종과 명성황후는 궁중에 연금된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후 조선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였으나, 러시아 주도의 삼국간섭에 의해 동북아 정세가 급변하였습니다.

    이때 명성황후는 러시아에 대한 접근을 통해 군주권 회복을 추구하였고, 조선 보호국화가 좌절된 일본정부는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를 주한공사로 파견하였습니다.

    이처럼 내외의 격동 속에 고종을 적극 내조해 왔으나, 이로부터 한 달 여 뒤 일본의 공권력 집단이 경복궁을 습격하여 명성황후를 야만적으로 살해하였습니다.

    사건 직후 일본 정계의 요인과 외교관, 기쿠치 겐죠[菊池謙讓] 등 언론인은 명성황후가 부패의 화신으로서 조선을 망친 ‘궁중의 암탉’이며, 이 사건을 흥선대원군과 조선군 훈련대의 범죄로 덮어 씌웠습니다.

    미우라 공사는 ‘흥선대원군의 요청에 응하여 군대를 동원하였으나 궁궐에 도착해 보니 사건은 일단락된 뒤였다. 이 사건과 일본 군민은 무관하다’하였습니다. Japan Daily Mail 등 일본의 영자신문은 이 사건을 ‘중세의 야만왕조’인 조선 궁중의 암투에서 빚어진 것으로 호도하였습니다. 이런 사실의 왜곡은 일제하에도 지속되었습니다.

    명성황후를 직접 대면했던 서양 외교관과 선교사의 부인 혹은 비숍 같은 영국인 여행가의 기록은 일본 측과 달리 명성황후에 대한 긍정적 서술이 적지 않습니다.

    명성황후는 궁중 여성으로서는 동양의 고전에 밝았고, 서양의 종교와 풍속, 정치와 의회제도, 여성의 교육과 지위 등에 관심이 지대하였다고 합니다. 한편 지적이고 개화된 궁중 여성이기도 했습니다. 명성황후는 유가적 소양과 서양의 문물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과 왕실, 군주와 국가의 활로를 추구하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국모’이자 근대형의 여성정치가로서 재평가되고 있기도 합니다.


  • 안녕하세요. 박정욱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명성황후인 민씨는 19세기 조선 후기의 여성 인물로, 혼인을 통해 왕실과 연결되어 권력을 행사하였습니다. 그녀는 왕후가 된 이후, 조선 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유교 사상에 따라 집안에서 정치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러나 민씨는 자신의 아들인 흥선대원군의 왕위 계승을 위해 천만원의 금품을 미리 받아들였다는 혐의로 반란으로 몰려들어 징역형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 이후, 민씨는 정치적인 영향력을 상실했고, 결국 삼도 지방에서 격리되어 생활하다가 별세하였습니다.

    민씨는 남편인 명성황제와의 정치적 야망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녀는 명성황제를 자신의 권력 기반으로 사용하려고 하였으며, 궁중에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여성 인물로서, 그녀의 정치적 영향력은 상당했습니다. 그러나 반란 사건 이후에는 그녀의 권력은 약화되었으며, 그녀의 인생은 비교적 비극적인 모습을 띠게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보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종이 친정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대립을 하였고 여러 침입으로 인한 국내 정변에 가운데 있어서

    일본을 견재 하던 강단있는 황후였습니다.

    그걸 느끼고 일본이 살해를 하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 분야, 재무설계 분야, 인문&예술(한국사) 분야 전문가, 지식iN '절대신 등급' 테스티아입니다.

    ✅️ 명성황후 민씨는 권력욕이 상당했던 사람이며, 사실상 고종을 대신해서 정치를 주도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일제가 을미사변을 통해 고종이 아닌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이며 이것만 봐도 정치적 입지가 누가 높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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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명성황후는 명석하고 외국문물에 관심이 많았으며 외교에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고 국익을 위해 헌신하며 검소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명성황후;

    1851년(철종 2년)경기도여주군여주읍 능현리 250-1에서 민치록(閔致祿)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1958년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살았으나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주변에 알려졌다.

    1865년 외척으로 인한 폐해가 없을 것이라고 기대한 흥선 대원군의 뜻에 따라 16세에 고종의 비(妃)에 간택 되었다. 당시 서구 열강의 개항 압력이 프랑스(병인양요,1866년), 미국(신미양요,1871년) 등과 강화도에서 군사 분쟁으로 나타났으나 흥선 대원군은 단호한 집념으로 이들을 물리치고 국내적으로도 경복궁을 중건하고 부정부패의 온상이었던 서원을 정리하는 등 전제 왕권 강화를 분명히 하고 있었다.1

    1873년흥선 대원군의 섭정이 끝나고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자 명성황후는 민씨 집안 사람들을 조정의 요직에 앉히고 대외적으로도 쇄국을 버리고,

    1876년병자 수호 조약을 체결하는 등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였으며 민씨 척신 정권의 후원 하에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등 중도 개화파가 형성되었다.

    1882년임오군란으로 한때 충주로 피난했으나 청나라가 군대를 보내 군란을 진압하고 흥선 대원군을 압송해가자 서울로 돌아왔다.

    1884년갑신정변으로 조정의 실력자이기도 한 자신의 친척들 상당 수가 김옥균, 박영효등 급진 개화파에 의해 죽음을 당하고, 또한청나라의 횡포에 대응하여 러시아에 접근했으나,

    1885년 이를 우려한 영국 군함이 거문도를 일방적으로 장악하고(거문도 점령 사건) 청나라도 흥선 대원군을 돌려보내는 등 제어 조치를 취하자 소강 상태로 들어갔다.

    1894년동학농민운동를 계기로 청나라와 일본양국군대가 조선에 입국청일전쟁이 일어나고 1895년청나라의 전쟁에서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명성황후는 다시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고 하였다. 이는 일본을 자극하는 결과를 가져와 '여우사냥'이라는 이름으로 미우라 고로우가 주동한 시해음모로, 경복궁곤녕합의 옥호루에서 일본의 낭인들에게 시해되었다(을미사변) 그뒤 폐위되어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다가, 같은해 10월 복호(復號)되었다. 1897년(광무1년) 명성(明成)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해 11월 국장(國葬)으로 청량리(淸凉里) 밖 홍릉(洪陵)에 안장되었다.

    고종의 황제즉위를 계기로 명성황후(明成皇后)라 칭한다.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명성황후(명종의 왕비)는 정치적인 야망이 많았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 중 하나입니다. 명성황후는 명종과 조선의 정치에 큰 영향력을 끼쳤으며, 그녀의 정치적인 야망과 국정개혁에 대한 노력이 크게 언급되고 있습니다.


    명성황후는 귀족적인 출신으로서, 그녀의 가문은 조선 초기부터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명종과의 결혼을 통해 왕실에 입문하였으며, 이를 기회로 정치적인 영향력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명성황후는 정치적으로 능하였으며, 그녀의 노력 덕분에 명종은 대신국을 폐지하고, 대신인을 지정하는 등 국정개혁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명성황후는 그녀의 정치적인 야망으로 인해, 많은 비판과 반감을 받았습니다. 그녀의 행동이 조선의 전통적인 가치와는 맞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녀의 노력 덕분에 권력을 가진 가문들이 다시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되어, 이를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그녀의 노력 덕분에 조선의 국정개혁과 현대화를 이루는 데 큰 기여를 하였으며, 그녀의 업적은 조선시대 정치사에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