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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문어80
조용한문어8023.05.04

세조 때 일어났던 '이시애의 난'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계유정난으로만 세조를 알고 있는데요.

세조가 즉위하고 이시애라는 사람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하는데

이시애는 어떤 인물이며, 무엇 때문에 반란을 일으킨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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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시애는 함길도의 대표적인 세력가 집안으로, 함길도는 조선의 발흥지이고 북방 야인지역과 접한 관계로 지방관은 그 곳 호족 중에서 임명하여 대대로 다스리게 하였고, 남방민을 이주시켜 방어를 도모하였습니다. 그런데 세조대에는 중앙집권을 강화하여 북도 출신의 수령을 점차 줄이고 서울에서 관리를 파견하였는데, 특히 난이 일어나기 직전에 함길도병마절도사인 강효문과 그 당여가 불법·탐학을 자행하여 민중의 원성이 높았습니다. 또 전국적으로 실시된 호패법과 보법으로 군정이 수괄되고, 군역의 부담이 증대되었으므로 함길도의 세력가와 민중 모두 중앙정부에 불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조 때 이시애는 동생, 매부 등과 함께 “하3도 군병들이 수륙으로 함길도로 진격하고 있다. 조정에서 평안도와 황해도 병사를 보내어 설한령으로부터 북도에 들어와 장차 본도 사람을 모두 죽이려 한다”는 말로 민중을 선동하면서 반란을 일으켰습이다. 길주에 와 있던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을 모두 살해하고, 조정에 대해서는 “강효문이 한명회·신숙주 등의 중신과 결탁하여 모반하려 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먼저 죽였다”고 하면서 거병의 정당함을 주장하였습니다. 이후 이시애는 도내 각지의 유향소 토호들과 농민들의 호응을 받으면서 진격하여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을 모두 죽였습니다. 또 스스로 왕명을 받은 절도사라 칭하면서 함흥을 점령하고, 함길도관찰사 죽이고 삽시간에 함흥 이북지역을 석권하였습니다.


    조정에서는 구성군 준을 함길·강원·평안·황해도 도총사, 호판 조석문을 부총사, 허종을 함길도절도사, 강순·어유소·남이 등을 대장으로 삼아 3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반군을 진압케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반란이 기세를 떨치고, 조정내부에서도 반란군이 한명회·신숙주 등 중신들이 자신들과 내응하고 있다고 한 이간책에 말려들어 이들을 하옥시키는 등 차질을 초래하였습니다. 그러나 관군은 먼저 반군의 고립을 도모하고 반란지역 주민들을 회유하여 반군의 세력을 약화시켰습니다. 이어 홍원·북청·이원 등지의 싸움에서 반군을 대파하고 이시애 형제를 체포·참수함으로써 난을 진압하였습니다.


    이 난이 진압된 후 조정은 반군토벌에 공을 세운 구성군 준·조석문 등 45인을 공신에 책봉하였습니다. 지방반란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하여 전국의 유향소를 폐지하고, 함길도를 남북으로 양분하여 통제를 강화하였습니다. 한편 정치운영에 있어서도 적개공신을 중용하여 세조집권 이래로 정치력이 컸던 한명회 등 정난·좌익공신세력을 견제함으로써 왕권의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시애는 길주 출신으로 함길도를 근거로 한 호족 토반으로 1458년 경흥진병마절제사, 1461년 행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1463년 회령부사로 있다가 어머니의 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내려가 있던 인물입니다.

    조선초기 함경도는 여진족과 접하여있는 특수지역으로 중앙에서 수령을 파견하는 대신 지방의 호족 토반 중 명망있는 이를 지방관으로 임명하여 대대로 그 직임을 잇도록했는데 세조는 즉위 후 중앙집권화 정책을 적극 추진하면서 북도 출신 수령의 비율을 점차 줄이고 경관지방수령을 파견해나갑니다.

    또, 호패법실시, 이를 바탕으로 보법을 시행하여 군역자원을 철저히 확보하여 하였는데 이시애는 길주를 근거로 한 대표적 호족으로 이러한 세조의 정책으로 인해 지방에서 자신의 입지가 좁아지게 되자 비슷한 처지의 호족과 함경도 도민들을 선동해 난을 일으키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467년(세조 13년) 세조[조선](世祖)의 중앙집권적 정책에 반발해 이시애(李施愛)가 함길도민을 규합하여 일으킨 반란

    2 반란의 배경 및 원인

    함길도(함경도(咸鏡道)의 당시 지명)는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의 고향으로서, 조선 왕실의 발상지였다. 태조는 이 지역을 세력기반으로 하였으며, 여진족들을 복속시키며 힘을 키웠다. 세종대에는 4군 6진 개척을 통해 두만강까지 강역을 확충하였으며, 삼남 지방의 백성들을 이주시켜 함길도를 확고한 영토로 만들었다. 그러나 항상 북방 여진족과 대치해야 하는 상황에서 함길도를 방어하는 데는 막대한 인적, 물적 희생을 치루어야 했고, 이는 함길도민들에게 큰 부담이 되고 있었다. 조선은 개국 이후 함길도를 효율적으로 통치, 방어하고 왕실의 발상지를 우대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본토 출신 호족을 지방관으로 임명하여 대대로 다스리게 하였다. 하지만 세조가 등극한 후 중앙집권정책을 강화하여 북쪽 출신의 수령을 점차 줄이고 중앙에서 남쪽 출신의 수령을 파견하자, 함길도의 호족들은 이에 큰 불만을 품게 되었다. 더욱이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들이 축성 등의 사업으로 백성들을 괴롭히자 함길도의 민심은 크게 반발하였다. 실제로 이시애의 난 당시 토벌군에 참여했던 유자광(柳子光)은 반란이 크게 번진 까닭을 함길도에 파견된 수령들이 모두 무인이라 백성들을 혹사시켰기 때문이라고 파악하였다.

    세조는 전국적으로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하고자 하여 호패법을 실시해서 주민의 이동을 단속하고 인구를 철저히 파악하였으며, 보법(保法)을 통해 더 많은 백성이 군역을 지도록 하였다. 보법과 호패법이 시행되기 이전까지 함길도 지역은 지방토호세력이 강성하였고, 토호들은 자기의 수하들을 모두 자신의 호(戶)로 편입해 두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호(戶)를 기준으로 세금과 군역을 물릴 경우, 호 내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호에 대한 세금과 군역만 부담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호 내의 군정의 수를 모두 파악하여 군으로 징발하는 보법과 백성들에게 모두 호패를 차게 하는 호패법이 시행되면 종래와 같이 호를 유지하는 것이 어렵게 되고, 이에 따라 부세와 군역의 부담이 매우 늘어나게 될 것이었다. 이러한 것은 함길도 토호 뿐 아니라 일반 백성에게도 상당한 부담의 증가를 의미하게 되었고, 이에 대한 반발이 극심하였다.

    반란의 주역이 된 이시애는 길주 출신으로 대대로 함길도에서 세력을 가진 호족이었다. 그의 조부 이원경은 원래 평안도 출신으로 요동에서 원을 섬기고 있었으나 1370년(공민왕 19년) 이성계가 동녕부를 정벌할 때 항복하여 조선 건국 이후 삭방도 첨절제사, 검교문하부사를 역임하며 함길도에 터전을 닦았다. 그는 원래 “오로첩목아(吾魯帖木兒)”라는 몽골식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성계가 우라산성을 공격할 때 300여 호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한 이후 이름을 원경으로 고쳤다.

    그의 아들 이인화 역시 판영흥대도호부사, 함길도첨절제사를 역임하였다. 즉 이시애는 태조 이성계처럼 변방 출신으로 성장한 집안의 후손이자, 3대째 함길도에 세력을 가진 토호였던 것이다. 그 자신도 경흥진병마절도사, 첨지중추부사, 판회령부사를 역임한 바 있었다. 이시애에 대해 조정에서는 조부 때부터 관직을 세습하고 수령을 역임하였으며, 양민을 많이 거느리고 친척들이 지방에 뿌리를 내려 강력한 세력을 이루었다고 평가하였다.

    이시애는 그 자신이 북방의 토호로서 세조의 중앙집권책에 피해를 보는 입장이었던 데다가, 함길도의 호족과 일반 백성들이 모두 중앙의 통치에 불만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이들을 선동하여 함길도의 험한 지세와 강력한 병력을 이용해 반란을 일으키고자 하는 야심을 갖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