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왕은 왜 성충의 얘기를 안들었나요?
안녕하세요 백제시대 마지막왕 의자왕은 성충의 얘기만 들었더라면 백제가 멸망당하지 않을수도 있었다고 하는데요 왜 그랬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공교롭게도 655년 시점부터 백제 멸망에 관한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신라를 공격하기 직전에 붉은 말이 북악(北岳)의 오함사(烏含寺: 오합사)로 들어가 울면서 불당을 돌다가 며칠 만에 죽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오함사는 전쟁에 희생된 원혼들이 불계(佛界)에 오르기를 기원하면서 세운 사찰로, 하필 이곳에서 전쟁과 관련된 말이 죽은 것은 범상치 않은 징조였다. 656년성충이 전쟁을 예언하며, 기벌포(伎伐浦)와 탄현(炭峴)을 방비할 것을 권고하며 옥사(獄死)한 것도 이 무렵이다.
실제 655년을 기점으로 의자왕 정권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 때 정치의 일선에 나선 인물이 군대부인(君大夫人)인 왕비이다. 왕비의 등장은 의자왕 집권 초기에 소외되었던 왕족들의 권력 장악으로 보고 있다. 이에 주목하여 지배층의 분열 혹은 공적 권력의 성장이 없었던 것을 백제 멸망의 원인으로 보는 입장도 있다. 또한 태자가 부여융과 부여효(扶餘孝)로 병기된 것에 주목하여 태자 교체와 관련된 정치 변동으로 보기도 한다.
이에 비하여 신라는 김춘추의 집권 이후 당의 의관제(衣冠制) 도입과, 연호의 사용 등 적극적인 친당정책을 추진하여 당이 친신라정책(親新羅政策)으로 기울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655년 백제가 당의 통첩을 무시하자 백제를 먼저 정벌하는 쪽으로 선회한 것이다.
당의 백제 정벌은 이미 659년에 준비 단계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659년부터 『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가 백제 멸망 관련기사로 일관한 것은 이를 대변해준다. 당이 659년 파견된 일본 사신 사카이베노무라지이하시키[坂合部連石布]를 억류한 것도 이미 당에서 전쟁을 준비하였던 사실을 확인해준다.
이러한 준비 과정을 거쳐 660년 당의 소정방(蘇定方)주2이 이끈 13만 대군이 황해를 횡단하여 기벌포에 상륙하였다. 계백(階伯)의 5천 결사대는 김유신이 이끈 5만의 신라군을 황산벌(黃山伐)주3에서 저지하려 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그 결과 두 나라의 군대가 합류하여 7월 12일 사비성(泗沘城)을 포위하였다. 의자왕은 7월 13일 견고한 웅진성(熊津城)주4으로 도망하여 재기를 노렸으나 둘째 아들 부여태(扶餘泰)와 손자 부여문사(扶餘文思)와의 사이에 알력이 생겨 사비성이 맥없이 무너졌다. 이에 의자왕은 태자 및 웅진방령(熊津方領)의 군대를 거느리고 항복함으로써 백제는 멸망하였다. 최근에 발견된 예식진(禰寔進) 묘지명(墓誌銘)에 주목하여, “사태가 위급해지자 웅진방령 예식(禰植)이 의자왕을 사로잡아 투항하였다”는 새로운 견해도 제시되었다. 이와 같이 급작스러운 의자왕 정권의 붕괴는 전쟁이 사비도성을 중심으로 한 일부 지역에만 국한된 관계로 지방세력이 온존하여 백제부흥운동(百濟復興運動)이 거세게 일어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8월 2일 의자왕은 나당연합군 측과 굴욕적인 항복식을 거행하였다. 이후 9월 3일에 태자 부여효, 왕자 부여태 · 부여융 · 부여연(扶餘演) 및 대신 · 장사(將士) 88명, 백성 12,807명과 함께 소정방에 의해 당나라로 끌려갔다. 660년 백제가 멸망할 당시 의자왕은 60대 중반이 넘은 상당히 연로한 나이였다. 그해 11월 1일 낙양(洛陽)에 도착하여 당 고종(高宗)을 만나 사면을 받았지만 지친 여정과 나라를 빼앗겼다는 허망감에 사로잡힌 나머지 며칠 뒤에 병사하였다.
이후 그의 아들인 부여융은 웅진도독(熊津都督)이 되어 재기를 도모하였지만 백제의 고토(故土)를 신라에게 상실하여 당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최근에 증손녀인 부여태비(扶餘太妃) 묘지명이 발견되어, 의자왕의 후손들이 중국에서 백제 유민의 명맥을 이어갔음을 알 수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의자왕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