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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23.05.10

이인좌의 난이 일어난 배경에 대해 궁금합니다.

이인좌의 난이 일어난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원인이 궁금합니다.

이 난의 목적과, 결과도 함께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간략히 부탁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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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10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인좌의 난이 발생하기 이전 조선은 사회적으로 혼란한 상황이었다. 백성들은 각종 세금 부담과 지주층의 경제적 수탈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특히 양역문제와 관련한 부담이 컸다. 당시 백성은 군역(軍役)을 부담하는 대신, 군포(軍布)를 납부해야만 했다. 그러나 군포를 징수하는 과정에서 노인, 어린아이, 심지어 죽은 사람에게까지 군포를 징수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군포를 부담할 수 없었던 백성들은 유랑민으로 전락하였고, 이들은 도적단이 되어 관아와 지주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이 당시 도적단은 전라도 정읍에서 100여 명이 창과 포를 들고 다니고, 우두머리는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다닐 정도로 적지 않은 규모와 지휘계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안전과 기반 확대를 위해 상인, 승려, 유랑민과 결탁하여 세력을 확대하기도 하였다. 또한 공권력에 대항하는 일도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경상도(慶尙道) 영덕(盈德)에서는 향리와 수령을 위협하는 일이 발생하였고, 전라도(全羅道) 광주(光州)에서는 민란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중앙의 정치상황도 불안하였다. 노론(老論)은 ‘정유독대’를 계기로 동궁(경종[조선](景宗))을 즉위시킨 다음, 연잉군(영조(英祖))을 세제로 책봉하는 당론을 가지고 있었다. 이로써 노론이 동궁을 폐한다는 의혹을 진정시키면서, “효종(孝宗)의 혈맥과 선대왕(先大王)의 골육(骨肉)은 주상과 연잉군에게만 있다”는 왕대비의 언문 수교를 이용하여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노론 측의 움직임에 대해 남구만(南九萬), 최석정(崔錫鼎) 등이 이미 은퇴하였고, 박세채(朴世采)의 문인은 노론으로 옮기는 등 세력이 약해진 소론(少論)은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였다. 남인(南人) 역시 경신환국(庚申換局), 갑술환국(甲戌換局), 신사옥사(辛巳獄事)를 거치면서 세력이 약해진 상황이었다. 이러자 노론은 세제의 대리청정까지 추진하였다. 그러나 소론계와 남인의 강한 반대가 있고, 노론의 권상유(權尙游), 박치원(朴致遠) 등 일부세력도 이에 동조하였다. 이로 인해 결국 노론은 1721년(경종 1)에서 1722년(경종 2)에 걸친 신임옥사로 중앙정치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경종이 1724년(경종 4)에 죽고, 영조가 즉위하게 되자 상황이 급변하게 되었다. 영조는 즉위 직후에 노론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신임사화(辛壬士禍)로 귀양을 가 있던 민진원(閔鎭遠)을 소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석방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소론의 대표적인 인물인 김일경(金一鏡), 유봉휘(柳鳳輝), 최석항(崔錫恒) 등을 비난하는 상소가 잇달았다. 이를 계기로 영조는 김일경을 유배보내고, 신임옥사를 일으킨 목호룡(睦虎龍)을 처벌하였다. 그리고 1725년(영조 1)에는 노론계인 민진원, 정호(鄭澔), 이관명(李觀命)을 재상에 임명하였으며, 신임옥사는 무옥(誣獄)이라고 판정하여 피해자를 신원하는 을사처분(乙巳處分)을 단행하였다. 이로써 노론이 중앙정치무대를 장악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출처: 우리역사넷 이인좌의 난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세기 들어와 조선 왕조 정치체제의 내적 모순과 지배층 간의 갈등이 고조되고 유민이 점점 늘어나면서 몰락 농민과 결탁한 명화적이나 극악한 도적의 활동이 강화되어 갔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1728년 무신란이 발생하였습니다.

    무신란을 주도한 세력은 기존의 붕당 세력이 약화되고 집권층의 재편이 진행되는 영조 즉위 직후에 형성되었습니다. 무신란 주도 세력은 당론상으로 볼 때 소론 준론계와 탁남 및 소북계 인물들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들은 숙종 연간의 갑신환국 이후 정권에서 배제되고 경제적으로도 급속히 몰락해 가던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반란 세력은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는 반정을 통해서 중앙 정계로 진출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들 가운데 대표적 인물이 이인좌와 정희량입니다. 무신란의 당초 의도는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거병하면 여주와 이천에서 이에 호응하고, 주도층인 자신들이 서울을 교란시키면 평안 병사가 근왕을 구실로 상경하여 도성을 평정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무신란의 중심인물이던 이인좌는 스스로를 대원수라 자칭하고 1728년(영조 4년) 3월 15일 상여에 무기를 싣고 청주에 진입하여 청주성을 점령하였습니다. 반군들은 경기 및 충청도 일부 지역 민심이 정부 당국으로부터 이반되어 가던 상황에서 청주를 근거지로 확보한 후 그 세력을 강화시켰습니다. 이들은 경상하도에서 안음⋅거창⋅합천⋅삼가⋅함양 등을 장악하였습니다. 전라도에서도 부안과 변산의 토호는 녹림당 세력을 동원해서 부안 및 전주를 장악하였습니다. 각 처에 격문을 돌려 병마를 모집하고 관곡을 풀어 나누어 주는 한편, 서울을 향하여 북상하여 목천⋅청안⋅진천을 거쳐 안성⋅죽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영남과 호남에서의 거병이 계획대로 추진되지 못하였고, 경상도에서는 안동과 상주 점거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전라도에서도 나주세력의 호응을 얻을 수 없는데다 평안 병사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인좌는 결국 반란 진압을 위하여 출동한 도순무사 오명항의 관군과 싸워 안성에서 패하자 죽산으로 도피하였으나, 계속적인 추격으로 산사에 숨었다가 신길만 등 마을 사람들에게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해 3월 26일 친국에서 역모의 전모를 공술하고 다음 날 대역죄로 군기시 앞에서 능지처참되었습니다.

    무신란에 가담했던 소론계와 남인계 급진파는 이후 완전히 몰락하였습니다. 비록 소론계는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는 데 앞장섰으나, 난의 주모자 대부분이 소론이었기 때문에 무신란 이후의 정국은 소론이 열세를 면치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영조는 무신란의 발생 원인을 노론 세력만으로 구성했던 폐쇄적 인사정책 때문으로 보고, 노론 강경파보다는 노론⋅소론 간의 조정과 병용책을 주장한 노론 온건파 중심으로 탕평책을 실시할 수 있는 명분을 쌓게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왕권 강화와 정국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습니다.

    무신란은 영조와 집권 노론 측의 패쇄적 인사 정책과 정치 보복이 강화됨에 따라 정치권에서 소외된 사족층과 경제적으로 몰락한 양반인 잔반 등이 일으킨 반란이었고, 여기에 향임과 하층민까지 연대한 투쟁이었습니다. 그 계획 단계에서 몰락한 사족 및 재지 사림 혹은 토호나 향품, 장교 등의 관여가 확인되며, 전개 과정에서 일반 민인들의 광범위한 참여가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참여 동기를 감안할 때 이를 민중운동으로 보기도 합니다. 많은 민인은 당론 내지는 권력 투쟁과는 무관했지만, 반란을 통해서 부세 수탈을 면해 보려던 현실적 요구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신란을 거치면서 무신란에 가담했던 사회 세력의 경험과 지배 권력에 대한 저항의식이 확산되고 18세기에 들어 더욱 증폭되는 가운데, 명화적과 같은 보다 대규모적이고 지속적인 항쟁 활동으로 전개되어 나갔습니다. 그리하여 민중운동사 관점에서는, 무신란이 조선 후기 민중운동으로 질적으로 비약하는 계기를 조성하였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인좌의 난은 1728년(영조 4) 3월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의 과격파가 연합해 무력으로 정권탈취를 기도한 사건이다. 경종이 죽고 영조가 왕위를 계승하자 노론의 지위는 회복되고 경종 보호를 구실로 신임사화를 일으킨 소론은 문책을 받아 정권에서 배제됐다. 이에 소론 과격파는 경종 사인에 대한 의혹제기와 영조가 숙종의 적자가 아님을 명분삼아 모반을 정당화하고 세력을 확보해 나갔다. 난은 3월 15일 이인좌가 청주성을 함락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한성을 향해 북상하던 반군은 관군에게 격파되었고 영·호남의 호응 세력도 지방군에게 소탕되면서 진압되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