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삼별초의 항쟁이 단순한 몽고에 대한 항쟁이 아니었다는데 정말 그런가요?
역사 교과시간에 항상 고려의 몽고에 대한 저항 이야기가 나오면 어김없이 삼별초의 수차례의 항쟁들에 대해서 배우곤 했는데요. 그런데 이 항쟁이 단순히 나라를 보호하기 위한 단순저항이 아니었다고 하던데 어떤 숨은
저항이유가 존재하는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박정욱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삼별초(三別抄)는 13세기에 고려시대에 발생한 민란 중 하나로, 몽골의 침입과 고려 왕실의 부패로 인해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몽골의 침략과 함께, 고려 왕실 내부의 부패와 불만으로 인해 민중이 일으킨 항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고려 삼별초는 몽골의 정복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민중의 반발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항쟁이 몽골과의 싸움이 아닌 고려 왕실의 부정부패와 민중의 불만을 드러내는 중요한 사건으로서 이해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고려 삼별초는 다음과 같은 주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묘지사상(墓地事象): 고려 왕실의 타락과 탐욕적인 행동을 비판하는 글로, 이는 고려 국가의 부정부패와 불만을 드러내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풍마록(風馬錄): 국가의 재정 부패와 관료의 타락을 비판하는 글로, 이 역시 국가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민중의 불만을 반영한 내용입니다.
혁명강론(革命講論): 혁명과 개혁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 글로, 민중의 불만과 개혁을 통한 국가의 발전을 주장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몽골 침략 이전의 고려 국가의 내부적인 문제와 불만을 드러내는 것으로, 단순히 몽골에 대한 항쟁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은 고려의 왕실 타락과 부패, 그리고 민중의 정치적 참여와 개혁에 대한 열망 등 다양한 측면을 함께 다루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 중 하나로 간주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삼별초 항쟁은 고려를 예속화하려던 몽고의 정책과 조국의 예속화와 종속적 위치를 감수하면서도 자신의 특권적 지위를 보호하려던 국왕 및 그 일파의 행동에 반발한 항쟁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조사를 해본 결과 삼별초의 항쟁은 단순히 몽골에 대한 저항이 아니었습니다. 삼별초는 고려의 군사 조직이었지만, 그들은 고려의 지배층에 대한 불만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삼별초는 고려의 지배층이 몽골에 협조하고, 몽골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삼별초는 몽골에 대항하여 항쟁을 일으켰습니다.
삼별초의 항쟁은 고려의 지배층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삼별초는 고려의 지배층이 부패하고 무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삼별초는 고려의 지배층이 몽골에 협조하여 고려의 백성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삼별초는 고려의 지배층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기 위해 항쟁을 일으켰습니다. 참고 하셔서 도움되셨다면 추천 좋아요 부탁드려요~ 좋은 하루 되세요~ ^^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애초 고려 무신정권의 사병집단이면서 대몽항쟁에 앞장섰던 삼별초는 고려와 몽골사이에 강화와 굴복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개경환도가 발표되자 즉각 반기를 들게됩니다. 배중손을 중심으로 강화도에서 반몽정권을 수립하였으나 개경과 가까운 강화도에서는 오래 버티기가 어려워 진도로 옮겼고 전라도의 해안과 내륙지방이 삼별초의 손에 들어가자 고려 조정은 몽고와 여몽연합군을 만들어 총공격으로 진도를 함락시킵니다. 이때 배중손이 전사함으로써 전력에 큰 손실을 입게됩니다. 이에 남은 세력들이 김통정의 지휘아래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겨서 계속항쟁하였으나 병력의 열세와 물자의 부족으로 제주도도 함락되어 4년에 걸친 대몽항쟁은 끝이납니다. 이 항쟁은 대몽항쟁의 성격이 강했지만 한편으로 몽고와 강화와 굴복을 한 조정에 대한 불만도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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