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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1

1차 오일쇼크가 발생한 역사적 배경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전세계 경제에 영향을 미친 1차 오일쇼크가 궁금한데요.

이 1차 오일쇼크가 발생하게된 역사적 배경과 원인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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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제1차 석유 파동 또는 1973년 석유 파동(1973 oil crisis)은 1973년부터 1974년에 걸쳐 발생한 석유 파동이다.

    이 석유 파동은 아랍 지역의 산유국들이 대대적으로 석유 무기화 정책을 추진하기로 결정하면서 발생했다. 제4차 중동전쟁이 시작되면서 OPEC의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리비아 아랍 공화국, 이라크, 이란 제국, 시리아, 튀니지가 손잡고 석유를 감산하는 동시에 원유 가격을 인상했다. 여기서 4차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을 지지했던 미국, 영국, 캐나다, 네덜란드 같은 나라들이 피해를 많이 입었고, 4차 중동전쟁 당시 아랍권을 지지했던 프랑스, 서독, 일본, 대한민국 같은 나라들이 수혜를 많이 입었다.

    과거 제3차 중동전쟁 시절부터 아랍권은 석유 무기화를 시도한 적이 있으나 크게 실패한 적이 있었다. OPEC에서 석유 금수 조치를 결의하고 수출을 중단했으나, 이란 제국과 아프리카 지역,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베네수엘라, 미국까지 증산하면서 효과가 없었을 뿐 아니라 시장점유율을 크게 상실했을 정도로 손해를 막심하게 입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OPEC는 시장 점유율 회복을 위해 증산을 해 원유를 헐값에 팔아야 하기도 했다.

    제4차 중동전쟁에서 오일 쇼크를 주도한 사람은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부 장관 아메드 자키 야마니[3]였다. 그는 제3차 중동전쟁 시절 OPEC의 석유 금수조치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으로 보며 반대했던 선구안이 있었다. 그는 완전한 석유 금수란 불가능하며, 부분적인 금수조치는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제3차 중동전쟁 이후 그의 주장대로 되었고, 그의 발언권이 커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제4차 중동전쟁을 시작하면서 그는 금수 조치가 아닌 매월 단 5%만 감산해도 시장에 큰 충격을 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제3차 중동전쟁 시절의 금수 조치가 아니었기 때문에 OPEC 회원국들의 참여도도 높일 수 있었다. 이 전략은 성공적으로 맞아 들어가 1배럴 당 2.9달러였던 원유가는 한 달 만에 12달러에 이르렀으며, 이는 현재 달러 가치로 환산하면 14.5달러에서 55달러로 폭등한 것이었다. 당장 세계 경제는 헬게이트가 활짝 열렸다. 그리고 당시 친미 국가였던 베네수엘라와 인도네시아[4], 나이지리아와 비 OPEC 국가인 소련도 이 틈을 타 석유 가격을 대대적으로 인상했다. 이 석유 무기화 전략으로 아랍은 제4차 중동전쟁에서 일본과 유럽공동체의 지지를 얻어내는데 성공했으며, 박정희 정권의 한국도 1973년 12월 17일 아랍을 지지한 적이 있다.

    중동과 베네수엘라, 가봉 등의 산유국들은 말 그대로 역사적인 호황기에 접어들었고, 세계 최대의 산유국 중 하나였던 소련도 꽤나 쏠쏠하게 이득을 보았다. 그러나 기존의 저유가가 상식이던 시대의 세계 경제, 특히 미국과 영국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물론 그와 상관없이 다국적 석유 기업들이나 미국, 캐나다[5] 내에서도 석유 생산으로 먹고 살았던 지역은 나름대로 짭잘하게 이득을 보기는 했다. 그러나 석유 기업들에게도 나름의 고충이 있었는데, 당시 영국과 미국이 주도하는 석유 메이저 세븐 시스터즈는 자국에 석유를 우선 공급하지 않아 큰 비난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야만 했던 이유는 영국과 미국에 석유를 우선 공급해 경제 충격 완화를 시도했다가 OPEC 산유국들의 추가 보복이 두려웠을 뿐 더러, 냉전 시대 산유국이었던 소련의 영향력이 커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선택은 미국과 영국과 그의 우방국들에게 공평하게 분배하는 것이었다. 이를 두고 에너지 역사 전문가 다니엘 예긴이 1991년에 쓴 에너지 역사 관련 유명한 서적인 The Prize에서는 equal misery 내지는 equal suffering이라 불렀다. 중동 산유국들이 경제 타격을 입히려 했던 표적은 미국과 영국 그리고 자신들을 지지하지 않는 미국, 영국의 우방국들이었다. 참고로 그들은 자신들에게 지지 성명을 내보낸 일본, 한국, 유럽공동체에 5% 감산유예를 해준 적이 있다.

    중동의 석유 감산은 제4차 중동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계속되었으며, 1974년 3월이나 되어서야 감산을 중단했다. 1차 오일 쇼크 이후 사우디아라비아는 스윙 프로듀서(석유 시장 질서 주도국)의 지위를 얻게 되었고, 이를 주도한 아메드 자키 야마니 사우디아라비아 석유부 장관은 그 이후 미스터 오일, 석유 황제라는 별명이 붙으며 1986년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왕인 파흐드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가 그를 경질할 때까지 석유 수출국 기구(OPEC)와 세계석유시장에 막강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출처: 나무위키 석유파동